My Favorite/Movies2009/04/13 13:02
그저 히로스에 료코를 오랜만에 보고 싶어서 다운받은 이 영화.
어제 밤 12시 넘어 무심결에 보기 시작했다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어버렸다.

첼리스트였던 주인공이 뜻하지 않게 죽은 사람의 염을 해주는 납관사가 되어 느끼는 각가지 '죽음' 에 관한 이야기

억지로 눈물샘을 자극하려고 하지도 않고 스토리부터 음악까지 그저 천천히 잔잔하게 흘러가지만
동그란 작은 돌맹이 하나,
어린 딸이 가져다 주는 핑크색 립스틱 하나에
참을 수 없을 만큼 복받쳐 오르는 먹먹함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드라마 세카츄 볼 때 만큼이나 뜨겁게 오랜 시간 울었던 것 같다.

죽음.. 헤어짐.. 영원한 이별.. 

다신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배웅, 

지금 이렇게 잠시 상상해보는 것만으로 미치도록 아픈데..
실제로 이런 배웅을 해야할 땐 얼마나 더 아프고 힘들런지...




주인공의 연기도 참 좋았고
첼로 선율도 참 아름다웠고
어거지 없이 간결하면서도 단단한 구성과 스토리 전환도 인상적이었고
어느새 성숙한 여자가 된 히로스에 료코도 아름다웠던..

'슬프지만 아름답다' 라는 말이 참 잘어울리는
마음이 진정되면 한번쯤 다시 보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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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퍄노걸
My Favorite/Movies2007/03/11 14:37
벼르고 벼르다 이제서야 보게 된 드림걸즈..

역시 기대 이상으로 최고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랑루즈, 시카고만 못하다는 평도 있길래 어쩜 실망할 수다 있겠구나 싶었는데..

요즘 문화적으로 목이 말라있던 상태여서 인지..

일상에 그닥 재미있는게 하나도 없었던 상태여서 인지..

이 영화는 감동, 또 감동의 물결이 아닐 수 없었다.

비욘세라는 가수를 통해 흑인 미녀의 매력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건 물론이요,

아메리칸 아이돌에서 논란을 일으키며 탈락했던 제니퍼 허드슨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깜짝 등장해 소름끼칠 듯한 가창력을 뿜어대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 알고는 있었지만 그레이 아나토미의 닥터 웨버의 부인 아델의 깜짝 출연까지 ㅋ)

마지막 고별 무대 씬에서는 내가 생각해도 좀 오버다 싶을 정도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최근 본 영화 중 최고의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아.. 역시 음악이 최고다.

요즘 내 인생이 왜이렇게 피폐하고 재미없게 느껴졌나 싶었더니

항상 나를 둘러싸고 있던 음악과 감동이 사라져서였나보다...

음악이 이렇게 좋은 것인 줄... 음악이 이렇게 소중한 것인 줄,

음악이 있어서 얼마나 행복했었는가를

잠시 잊고 살았었다.

음악이 없는 세상은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나였는데..

최근 바쁜 일상에 쫓겨 그 간절함을 잊고 살았다...

이 영화를 통해 잠시 잊었던 음악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며...

나의 꿈, 내 인생의 궁극적인 소망을 한번더 곱씹어 보게 된다... 감사하다....


<드림걸즈 OST 고별무대 中  Beyonce, Sharon Leal, Anika Noni Rose  'Hard To Say Good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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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퍄노걸
My Favorite/Movies2006/12/10 23:15
대단한 영화였다.


누구의 머리 속에서 이러한 상상력이 발현되었으며...

누가 이렇게 말도 안되는 상상을 완벽하게 구성해서 시놉으로 만들었으며...

또 어떤 천재가 이런 심오한 시놉을 아름답고 환타스틱한 영상으로 연출하고 완성시켰는지가 궁금하리 만큼..


한마디로 기가 막혔다.


인간의 끝도 없는 상상력과 무한한 가능성에 박수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판의 미로


고단한 어른을 위한 판타지라길래 해리포터 정도 되는 단순한 판타지 물인 줄 알고 영화를 예매했다.

허나 막상 이영화는 판타지물이 아닌 잔혹한 전쟁영화였다.

왜 15세 이상 관람가인지 의문이 갈 정도로 끔찍하리만큼 잔인했다.

(18세 이상으로 이제라도 바꿔야 할 듯..--;)

하지만 이 영화가 끔찍한 전쟁영화라는 사실이 나를 더 놀라게 만들었다.

누가 감히 전쟁영화를 동심으로 가득찬 동화 같은 환타지와 함께 섞을 시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이처럼 완벽하게!


난 잔인한 영화라면 딱 질색이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끔찍하고 잔인한 장면은 신기하게도 그리 머리 속에 오래 남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의 잔혹함을 동화 속의 요정을 믿는 어린 아이의 순수함과 대비시켜가며 눈물나리만큼 섬세하고 아름답고 환타스틱하게 그려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쟁의 잔인함과 슬픔이 27살 내 인생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을지, 없을 지 모를 동심 속에 녹아 들어갔기 때문일까..

또 환타지라고 하기엔 너무나 꽉 짜여져서 앞뒤가 딱 맞아 떨어지는 완벽한 구성에 스스로가 감탄해서 일까..


아무튼 잔인한 영화라면 치를 떠는 내 자신이 신기하리만큼

극심한 잔혹함 속에서도 마음이 짠해지는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영화에서 단하나의 CG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

그 환타스틱한 동화 속 세계를 일일이 수공으로 만든거란다.

영상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어마어마한 시간과 정성이 이 영화 한편에 쏟아졌을 지 감히 상상해보며,

존경심까지 생긴다.


정말 근간의 본 영화 중 최고의 영화였다.

어제 본 'Mr. 로빈 꼬시기' 라는 우리나라 영화가 더욱더 창피하게 여겨지더라는... 쩝..


이런 훌륭한 영화와 함께 주말의 여유로움을 마무리 지을 수 있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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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서의 순정 등..  (1) 2005/05/03
Posted by 퍄노걸
My Favorite/Movies2006/12/10 00:00
저스트 프랜드와 해바라기를 곧 볼 예정이어서 오늘은 마땅히 볼 영화가 없었다.

그래서 마지못해 보게 된 영화 MR.로빈 꼬시기.

혹시나가 역시나...

2시간을 버리고 온 느낌.

초딩을 겨냥한 영화랄까... 여자들을 바보로 아는 영화랄까...

영화를 보고 나오며 다니엘 헤니의 몸매밖에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없다.


엉성하고 전혀 동감되지 않는 스토리 전개에 어줍잖은 로맨틱 코미디, 과장된 헐리웃풍의 음악과 연출...

무엇 하나도 조화롭지 않은 맛없고 싱거운 비빔밥을 먹고 난 후의 그 기분이다.

미스터 로빈 꼬시기



엄정화의 열연은 돋보였으나 그녀의 열연보다는 이상한 영어 발음과 잔주름에 눈과 귀가 가고... --;;

다니엘 헤니도 멋진 몸매에 비해 연기력이 너무 많이 부족했다..

그나마 그에게 어울리는 킹카 역할이라 표는 좀 덜 났지만...


어쨌든 성인이라면 비추다.

중고딩이라면 백마 탄 왕자님의 등장에 기분 황홀해 질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윽... 아까운 내 13000원...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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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퍄노걸
My Favorite/Movies2005/05/03 03:43
이번 주 볼 예정인 영화들..

1. 댄서의 순정


가장 기대되는 영화..
본 사람들 마다 재미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문근영이 예쁘고 귀엽고 좋다.. ^^
가을동화때부터 눈에 확 띄더니 눈에 띠게 성장했다.. ㅋㅋ
예쁘고 착하고 성실한것 까지 모자라..
OST들어보니 목소리까지 예쁘다.. 게다가 이제 춤도 잘추겠지..  
정말 세상은 불공평하다..!


2. 트리플X 2


전편을 매우 재밌게 봤었는데.. 과연 2편은 어떨지..
주인공도 바뀌었다 그러고 별로 기대가 안되긴 하지만..
그래도 봐 줄 예정..
기대보다는 재밌었다는 사람들도 있고 해서..


3. 어바웃 러브


너무나 재미있게 본 이프 온리 여주인공 제니러 러브 휴잇이 나온대서 봐보려고 한다..
스토리를 대충 보니 이프 온리 보다 훨씬 못할 것 같긴 하지만..
포스터가 예뻐서 그런지 재목 때문에 그런지 웬지 모르게 맘이 끌린다.. 과연 어떨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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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퍄노걸
My Favorite/Movies2004/09/17 15:06
Key 이기고 싶었던, 이길 수 있었던,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어느 꼴찌 투수의 찬란한 나날.


프로야구 원년 MBC 청룡 어린이 회원이었던 나는 삼미 슈퍼스타즈를, 그들과 청룡이 맞붙는 날이면 한시름 놓았던 팀으로 기억한다. 나와 친구들은 웬만하면 지는 그 팀을 ‘삼미 슬퍼스타즈’라고 불렀던 것도 같다. 물론 페이소스 따위를 스포츠에서 구하기에 우리는 너무 어렸다. “약체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팬이라 좋은 것은 패배를 의연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점”이라고 자랑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쿨한 수필을 읽은 것도 훨씬 나중 일이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열등생과 아웃사이더는 영화의 오랜 스타다. 그들의 성취담은 영화가 스토리라는 것을 갖게 된 이래 환영받는 소재였다. 이 테마에 대한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꾸준한 매혹은 약자의 반격을 그린 내러티브에 내장된 파괴력을 증명한다. 엄밀히 말해 <슈퍼스타 감사용>의 주인공 감사용은, 복원해야 할 실존 인물이라기보다 고전적 약자 히어로의 속성을 뭉뚱그린 일종의 기호다. 과연 <슈퍼스타 감사용>은 예고편부터 셌다. 넥타이를 날리며 자전거에서 내린 후줄근한 철공소 주임이 코치에게 “제가, 감사용입니다”라고 외치는 광경만으로, 투구에 몰두한 이범수의 옆얼굴만으로 코끝이 저리기에 충분했다.


학창 시절 야구선수였으나 실업팀에 뽑히지 못하고 삼미특수강에 입사한 감사용(이범수)은 직장 야구로 꿈을 달래던 어느 날 좌완투수 없는 프로팀 삼미 슈퍼스타즈 공모에 합격한다. 그러나 건어물 가게를 하며 삼남매를 키우는 홀어머니(김수미)에게 “직장을 때려친 게 아니라 옮긴 것”이라는 아들의 주장은 믿기지 않는다. 선수가 됐으나 마운드에 설 기회는 오지 않고, 마운드에 서긴 했으나 선발 출장 명령은 좀체 떨어지지 않는다. 벤치의 감사용은 출전한 선수들에게 항상 “자신있게! 괜찮아, 괜찮아!” 외치는데, 그것은 스스로 듣고 싶은 말처럼 들린다. 구장 매표소 직원 은아(윤진서)와 사랑이 더디게 싹틀 무렵, 기회는 벽력처럼 찾아온다. 20연승 세계 기록에 도전하는 박철순 선발 경기의 상대를 다른 투수들이 기피하는 것. “선수 같지도 않은”이라는 비웃음에 답하기 위해 감사용이 나설 때다.


<슈퍼스타 감사용>은 실화가 아닌 대목에서는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한 영화적 클리셰를 적극 동원한다.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법 교과서에 예제로 실릴 법한 상황이 즐비하다. 달리던 감사용이 시위대열에 휘말렸다가 정신을 차리면 슈퍼스타즈의 거대한 마스코트 앞이다. 그의 발탁은 회사 구내방송으로 쩌렁쩌렁 공표되고 직장 동료였던 배우지망생은 스타가 되어 하필 감사용 선발경기 시구를 던진다. 군중에 떠밀려 억지로 스타 선수의 사인을 받는 상황도 빚어진다. 그러나 이들이 배치된 리듬은 그만큼 영악하지 않다. 직장생활의 답답함, 출전의 기다림, 선발 출전을 꿈꾸는 시간의 구획이 야무지지 못해 긴장의 상승세가 불분명하고, 여러 차례 등장하는 몽타주 시퀀스의 요점도 더 명확할 필요가 있다. 동화 같은 로맨스도 실화의 힘을 갉아먹는다. 윤진서는 좋은 피사체지만 CF 이미지 그대로 해맑기만 해서 사람이라기보다 희망의 요정 같다.


김종현 감독의 제구력은 이야기를 전진시킬 때보다 멈추어 사용의 가족과 야구팀을 ‘묘사’할 때 쾌조를 보인다. 서로의 이야기를 안 듣는 척하면서 듣고, 상대가 들은 걸 알고도 내색하지 않는 식으로 소통한다는 점에서 매우 한국적인, 사용의 집안 풍경은 김수미의 곰삭은 호연에 힘입어 관객을 설득한다. 한편 패배에 중독돼 “이기면 불안하고 역전당하면 안심이 되는” 슈퍼스타즈 선수들이 뒤엉켜 있는 더그아웃과 로커룸을 묘사할 때, 대사와 카메라 움직임에는 성실한 고심의 흔적이 역력하다. 영화의 긴 클라이맥스인 OB베어스 대전의 역동적 촬영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심호흡처럼 흩어지는 투수의 송진 가루와 홈베이스에 누워 하늘을 보는 주자의 미소를 잡아내는 애정어린 눈이다.


아마 <슈퍼스타 감사용>에는 두개의 길이 있었을 것이다. 삶의 양식으로서 패배를 천착하거나 아니면 이기고 싶다는 패자의 열망을 기념하거나. 후자를 택한 이 영화는 지는 데 익숙해지지 말라고, “나도 이길 수 있었다" 고 당당히 울먹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삼미 슈퍼스타즈와 감사용의 싸움은 철저한 패배의 맥락 위에 있었다. 중요한 것은 스타의 기록 갱신이지 삼미의 1승 추가가 아니었다. 승리하고 싶다는 삼미와 감사용의 열망은 사람들이 건성으로 끄덕이면서도, 내심 귀찮아 뭉개버리고 싶어하는 종류의 진실이다. 그래서 그들의 1승은 오직 그들에게만 중요하고, 승부를 넘어선 실존적 의미를 얻는다. <슈퍼스타 감사용>은 존경할 만한 적수의 존중 속에서 100% 진력해 승부를 겨룰 수 있는, 생의 충만한 순간에 관한 영화다. 그날 감사용은 다 이루었다. 그래서, “삼미는 1983년 전기리그 2위를 했다”는 위로 투의 에필로그 자막은, 다른 노래에서 떼어온 후렴처럼 거추장스럽다.

김혜리 vermeer@cine21.com

출처 -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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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퍄노걸
My Favorite/Movies2004/09/17 15:03

순진한 척 미국의 가짜 휴머니즘 전파하는 <터미널>




<터미널>은 <화씨 9/11>과 세 가지 점에서 닮았다. 첫째 미국의 건국이념은 곧 죽어도 휴머니즘에 기초해 있다는 어린애 같은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고, 둘째, 외국인들에 대한 삼엄한 경계는 필수적인데 거기에 여전히 틈새가 많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으며, 셋째 ‘악’을 체제가 아닌 인물에 집중시켜 증오의 표적으로 삼는 의인화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물론 두 영화는 다르다. 현실을 재료로 픽션 같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화씨 9/11>과 세트로 지은 가짜 공항이 표상하듯 완전한 허구를 현실인 양 믿게 만드는 <터미널>의 전략은 정반대로 향하고 있으니까. <터미널>도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세상에… 지금 장난하나? 난민이었던 이란인의 11년간의 ‘자기-분열적’ 세월을, 일시적 무국적 상태인 가상(!) 동유럽인의 9개월간의 ‘사회-친화적’ 시간으로 윤색하고선, 감히 ‘실화 바탕’을 운운하다니!


미국이라는 거대체제의 모순과 문제점을 국장 캐릭터로 의인화하다


외국인에게 입국절차 까다롭기로 유명한 지엄하신 미국의 문턱에서, 영어 한마디 못하는 외국인이 어떤 ‘공황(!) 상태’를 겪는지는 영화가 환기해주는 이상으로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것은 말을 보탤 필요도 없는,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다. 더욱이 유색인종이라면 거기에 한술 더 뜰 테고. 그런데 영화는 이 자명한 사실을 무슨 대단한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매우 스페셜한 설정을 가져온다. 그는 현실에 있지도 않은 ‘코라코지아’에서 왔으며, 그 나라에 쿠데타가 났다는 것이다.

애초에 미국이 나라 같지도 않게 생각하는 나라(<화씨 9/11>에서 언급된)도 많고, 미국과 연루된 전쟁을 겪는 나라도 부지기수인 현실에서, 영화는 그런 현실이 주는 불편함을 몰아낸다. 현실의 무게가 없는 가공의 나라로, 그나마 동유럽이면 양반이며, 그 나라는 평소에는 미국과 별 문제가 없었는데 하필이면 그때에, 그것도 미국과는 무관한 순전히 자국문제로 그가 난처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교묘한 설정이 주는 효과는 명백하다. 첫째, 마치 이런 비극이 현실의 것은 아니라는 듯한 ‘이중 속임수’(진실을 말하면서 거짓인 양 말하는)를 구사하고, 둘째, 이 억류가 결코 미국의 책임은 아니라는 ‘면피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이 사람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배타적이고 오만한 미국의 출입국 관리시스템이 아니다. 그것은 이 사내의 지독히도 ‘운없음’에 기인한 것인데, 첫째는 하필이면 그때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고, 둘째는 하필이면 ‘그런 놈’을 만난 것이다. 영화는 미국의 출입국 관리시스템의 엿 같음을 오로지 한 사람으로 의인화한다. 국장의 행동은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다. 영화 초반에 “책임을 떠맡기 싫다”며 복지부동의 현명함을 설파하던 그가 곧이어 아랫사람들도 다 보는 앞에서 자신의 개인성까지 드러내며 그에게 적대적 관심을 쏟는다. 일부러 일자리를 만들고 일일이 감시하며, 나중엔 이쁜이더러 그를 만나는 이유와 깡통의 의미까지 캐묻는다. 대체 그럴 필요가 어디 있을까? 제 입으로 뒤 닦는 휴지 운운하며 상대도 안 된다는 그는 도무지 뭐가 아쉬워서 “아무것도 아닌 자”와 일대일의 신경질적 대결상황을 만들고, 나중엔 문제없는 서류조차 승인을 거부하며, 그에게 ‘바로 내가 너를 막는다’는 악감정을 쌓는단 말인가? 말로는 그에게 “이게 게임인 줄 아냐?”며 윽박지르면서도, 자기야말로 게임으로 즐겼다는 듯 마지막 공항 문 앞에서 ‘에이 아까워라’는 표정을 짓는 그의 미스터리한 행동들을 과연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아마도 병적 히스테리 환자이거나 그에게 개인적으로 매료되고 열등감과 질투심을 느끼며,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와 감정을 알리고 싶어하는 (스토커 성향을 지닌) 남자 (아마도 게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는 오로지 개인적으로(!) 미쳤을 뿐 전임자는 그와 같지 않아서 나보스키로부터 인간성을 배우라며 치료 혹은 교육적 멘트를 날리기도 하며, 그의 아랫사람 역시 그와 같지 않아서 명령에 보란 듯이 불복한다. 하기야 그는 이미 권위가 없어졌으니, 명령이 안 먹히는 것도 당연하다. 그는 관료사회 지휘관이 가장 해서는 안 되는 짓, 즉 자신의 생생한 속내를 부하직원들에게 드러내는 짓을 했기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체제의 폭력을 한 사람의 신경질로 환치시키는 거룩한 뻔뻔함이라니! 하기야 클라이맥스에 해당되는 대걸레 대 비행기의 당랑거철(螳螂拒轍) 삽화가 이미 영화의 스타일을 해명(?)하고 있지 않은가? 노인이 비행기와 맞장뜰 수 있듯이, 낙천적이며 기다릴 줄 알고 속이지 않는 한 외국인이 미국이라는 체제의 성벽과 맞설 수 있다는 환상을 유포하고픈 감독은, 거대한 체제의 모순에 주목하는 대신 이를 단 한명의 신경증 환자로 맞바꿔치기한다. 어차피 그의 세계에서는 대걸레와 비행기도 대응 가능하므로, 체제 대 개인이 대응되고 치환된다 한들 안 될 게 없다.


거짓 동화는 그만!


영화가 전하는 또 하나의 대단한 허구는 그들이 나보스키를 한결같이 통일된 개인으로 이해하고 기억한다는 것이다(이에 비하면 ‘9개월 만에 영어회화 마스터하기’는 애교에 가깝다). 이것이 얼마나 기적적인지 박찬욱의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여섯개의 시선> 중)를 보면 확연해진다. <믿거나…>에서 찬드라는 끊임없이 자신을 설명해도 아무도 이해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 이름조차 제멋대로 붙여져 이리저리 보내지고 책임의 행방은 몇 바퀴를 돌아 묘연해진다. 그녀는 미치광이로 분류된 채 어떤 책임자도 대면하지 못하고 6년의 세월을 보낸다. 그녀는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할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렇다. 무릇 가해자는 얼굴이 없는 법이다. 광주학살이나 <블러드 선데이>에서 보듯이, 맞은 사람은 있어도, 쏜 사람은 없다. 원수를 갚자는 게 아니라 제발 누군지나 알자고 수십년을 싸워도 가해자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터미널>에서 자신이 가해자라고 시종 얼굴을 디미는 국장은 뭔가? 배후의 더 큰 모순을 은폐하기 위해 자폭하는 가미카제가 아닌가?

조악하고 작위적인 설정일망정 감독은 이쁜이를 그와 만나게 하기 위해 ‘외로운 사랑’이라는 우울한 훈장을 그녀 가슴에 달아주었다. 그러나 감독은 최소한의 장치나 성의도 없이, 국장이 그에게 품는 불가해한 애증을 무작정 들이댄다. 체제를 의인화하여, 국장에게 미국의 배타성/폭력성/오만함 등을 투사시키고, 그것을 오로지 개인성의 차원으로 국한시키는 <터미널>의 태도는 단순히 치졸함이나 비겁함을 넘어 교활하고 사악하다. 더욱이 이와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미국이 나보스키를 비롯한 이방인들을 사랑한다며 거짓 동화를 나불대는 팍스 아메리카니즘의 낯짝은 차마 보기 민망할 지경이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chingm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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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퍄노걸
My Favorite/Movies2004/09/16 15:08

예술로서 영화성장(1906년~1915년)

가. 필름다르 운동

미국 영화 산업이 강요한 상영시간의 엄격한제한으로부터 자유로운 유럽인들은 자연스럽게 장시간의 영화소재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Film d' Art영화사는 유명한 연극배우들이 출연한 성공적인 연극들을 영화화하는 최초의 영화사였다. 필름다르는 전체연극의 상연을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 열두번째 열 중앙에 카메라를 배치하고 연극의 배경과 배우의 연기를 하나의 쇼트로 촬영하였다. 최초로 제작된 필름다르 영화는 '기즈공작의암살(1908년)로 그 당시 프랑스의 중산층 관객들에게는훌륭한 예술로서 받아들여져 흥행에 성공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제작된 필름다아르 시리즈물 중에서 세기의 배우 Sarah Bernhardt가 출연한 'Queen Elizabeth'(1912)는그녀의 연기를 국제적으로 알리게 한 영화였다. 예술로서 영화의 돌파구를 연극의 영화화로 시작한 것은사실 영화인의 큰 실수 중의 하나였다. 프랑스의 관객과영화인이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수년 후그리피스의 영화를 본 후의 일이었다. 우습게도 프랑스의 장편영화의 유행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이태리의 스펙타클영화 제작과 미국에서 장편영화 상연 성공으로 그리피스의 대작을 만들게 하는 근원이었다.

나. 이태리의 스펙타클 영화

훗날 미국의 장편영화 특히 그리피스의 대작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이태리영화의 경향은 그들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영광스러운 과거의 배경에 연유한다. 그것은 현존하는 역사의 유물과 과거사를 배경으로 한 역사적종교적 스펙타클에 대한 소재들이다. 이태리 최초로 만든 스펙타클 영화는 'The Last Day of Pompeii'(1908년)이다. 그러한 지속적인 형식으로 만들어진 'Quo Vadis'(1912)는 프랑스의 '엘리자베스여왕'보다 훨씬 성공적인 영화로 이태리 스펙타클 영화의 전통은 'Cabiria'(1914)에 이르러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다. 한니발의 알프스 횡단과 시라큐스시 공격을 중심으로 구성된 '카비리아'는 거대한 세트와 석고모형 그리고 생동하는 연기와 촬영기법은 특별히 작곡된 교향악과 함께 미국영화의 장편영화 제작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모든 면에서 중후한 이태리의 스펙타클한 극들은 연극을 능가하는 우수성을 과시했으며 장편영화를 확립하는기반을 닦았다. 그 당시 세계 영화시장의 주도권은 당연히이태리가 거머쥐었으며 얼마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에의해 상실되었다.

전달매체로서의 표현기법 확립(1916~1925년)

가. 미국 영화의 전통

David Wark Griffith가 만든 일련의 대작영화와 Mack Sennett 와 Charles Chaplin 이 개척한 미국 희극영화의전통은 20년대 미국 무성영화의 표현기법을 정립한다. 그리피스는 그가 보통 만든 영화보다 두배나 긴 장편영화 'Judith of Bethulia'(1913)를 완성한 뒤 훨씬 더 큰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바이오그라프 영화사를 떠난다. 그는 상업적인 규제를 벗어나 어느정도로 이태리장편영화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TheBirth of Nations'(1915) 와 'Intolerance'(1916)를 만들어 종래 영화제작 상의 모든 전례를 깨트리는 미국영화의 스펙타클을 보여준다.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Nations)'은 성공했지만 그내용의 인종적 편견으로 인해 분노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리피스의 새로운 매체에 대한 타고난 영화언어적구사능력은 미국영화의 아버지요 영화문법의 시조로 일컬을 만하다. 또한 '불관용(Intolerance)'은 대중적 호소력의 부족과는 관계없이 그리피스 이래 모든 영화적 발달은 그리피스 안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한다고주장하는 장 뤽 고다르의 말을 만족시킨다. 전후 레닌은'불관용/을 소련에서 순회상영하도록 결정하여 10년 동안계속 상영하였다. 쇼트중심의 영화, 쇼트의 다양화를 통한 영화언어의 확립은 이런 이유로 소련의 몽타쥬론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리피스가 영상언어에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을때

초기의 미국희극영화는 그리피스가 열중했던 기존 에술형식의 몇가지 기본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공헌한다. 세네트는 그리피스가 새롭게 개발한 쇼트들의 다양함을 희극적 목적으로 잘 이용한 대표적인 영화인이었다. 초기 미국희극영화는 프랑스의 기상천외한 환상적 효과와익살스러운 연기를 보여주는 '트릭영화'에 영향을 받은영화 이전의 미숙한 단계에 있었다. 채플린의 등장은 프랑스의 린다(Max Linder)를 모방하는 의상과 상투적인 표현을 도용했고 세네트의 키스톤 영화사 시절의 채플린의영화는 그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포터와그리피스의 액션 멜로드라마의 특색인 추적은 세네트의 슬랩스틱 코메디의 양식을 구조화 시키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날카로운 사회적 일면을 들어내는 세네트의 희곡은 채플린에 이어져 그 표현이 확대된다. 1915년에는 그리피스, 세네트, 인스,  세 사람이 'TriangleFilm Corporation'를 설립한다. 인스(Tomas ince)는서부극 장르를 개발하여 그리피스의 멜로드라마와세네트의 희극물에 견줄만한 인기를 얻어내고 있었다.인스가 자신의 영화사를 만들기 위해 트라이앵글을 떠나컬버시에 거대한 촬영소를 지었는데 후에 MGM 촬영소가된다. 촬영소의 대표이며 제작감독으로 전체 제작프로그램을 최초로 제작, 감독한 사람이 그였다.인스가 개발한 제작방식은 20년대 허리우드 영화의 표준적인 관례가 되었고 그 영향은 세계 각 영화회사의 제작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나. 스칸디나비아의 영화

전쟁 전부터 세계 영화시장에서 성공적인 경쟁활동을 벌여온 스웨덴과 덴마크의 영화산업은 스칸디나비아 영화산업을 이끌어 왔다. 1906년 코펜하겐에 설립된'Nordisk Film Kompagni'와 더불어 성장한 스웨덴 영화산업은 1919년 'Sven나 Filmindustri' 합병을 통해성장하였다. 초기 덴마크 영화는 질적인 면에j 당시 미국영화와견 줄만했고 그리피스나 세네트, 인스에 의해서 개발된 영화형식을 독특한 스웨덴의 영화로 변모시켰다. 그것은 후에 독일 무성영화의 전성기로 이어진다. 미국영화가그랬던 것처럼 덴마크 영화는 실외 촬영을 중요시 했고산뜻한고 뚜렷한 묘사에 관심이 컸다. 내용상으로는스칸디나비아의 민속과 문학에 내재한 어둡고 신비스러운 전설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다뤘다. 이 점이 덴마크 영화의 전통을 20년대 스웨덴과 독일에 연관시키는 요소가 된다.Benjamin Christensen 감독은 그리피스와 같은 시기에다양한 쇼트를 사용한 선구적인 작업으로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주제를 다루는 덴마크 대표적 영화 작가이다.그의 'Wichcraft Through the Ages'(1922)은 도착적인성의 묘사로 많은 나라에서 상영금지 처분을 받은 현대적인 작품이었다.

그 뒤를 이은 Cart Theodor Dreyer 감독은 초기의 덴마크영화가 이룬 업적을 세계 영화와 연결시켜 오히려 자국에서 보다 다른 나라에 더 알려진 감독이다. 그리피스의 불관용과 유사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Leavesfrom Satan's Book'(1920) 는 종교적이며 초자연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영화속의 4부분 줄거리에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악마는 사람들이 친구와 가족을 배반하도록 유혹한다. 그리피스적인 빠른 커팅과 거대한 클로즈업 그리고 카메라의 움직임을 길게 지속시키는 리얼리즘이 돋보이는 장치를 사용한 세부적인 묘사와 뛰어난 화면구성이 특색이다. 그의 작업은 베를린과 코펜하겐에서 지속되었으며 'The Passion of Joan of Arc'(1928) 'Vampy'(1932), GERTRUD'(1964) 등 몇 편 안되는작품을 통해서 보여준 영화형식의 발전에 대한 그의공헌은 지대하다. 한편 드레이어와 같은 시기에 스웨덴의 영화산업에 뛰어든  Victor Sjostrom 과 Mauritz Stiller 감독 그리고소설가 Selma Lagerlof 는 스웨덴 무성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주요 인물들이다. 종종 전설로부터 소재를 취하는 라게르프의 소설을 영화한 이들의 영화는 스웨덴 시골의 뛰어난 정경,

도덕적 이야기의 불길한 예감과 초자연적인대상을 그리는 스웨덴 영화의 특질을 형성해 베르힘반의 영화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 스틸러는 영화기술적인 면을강조한 감독으로 'Sir Arne's Treasure'(1919)과 루비치의 외설코미디에 영향을 준 'Erotikon'(1920) 그리고독일에서 만든 가르보의 출연으로 유명한 'The Story ofGosta Berling(1924)' 등으로 알려져 허리우드에 초빙된다. 시외스트룀의 'The Phantom Chariot(1920)'는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갈등과 투쟁에 초점을 맞춘 영화로 스웨덴의 확고한 연극과 문학의 전통으로부터 나온 스웨덴영화를 시사하고 있다. 그 역시 미국에 초빙되어 스칸디나비아 영화 분위기를 보여주는 허리우드 최고수준의 영화 'The Scarlet Letter'(1920)를 만든다. 종전 후의 스칸디나비아 영화는 쇠토하여 대부분 미국영화가 제공하는 인기스타와 모험, 스펙타클, 코미디를 수용하였다. 일반관객의 취향에 호응하여 잃어버린 관객을 되찾겠다는 스칸디니비아 영화계의노력은 그들의 특질을 줄여감으로써 자신들의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들었던 전통을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스칸디나비아 영화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간 독일은 소수의진지한 관객들 덕분에 독일 예술영화의 꽃을 피우기시작한다.

다.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

영화사에서 표현주의의 신조를 가장 순수하고 완벽하게적용시킨 영화는 Robert Wiene 가 연출한 'The Cabinet ofDr. Caligari'(1919)이다. 오래된 전설과 민요로부터 주제를 빌어온 음울하고 환상적이며 섬뜩한 이 영화는 표현주의적 무대장치로 인해 아방가르드 영화의 선례로 알려졌다. 그것은 베를린에서 시작된 H문 Richter 의'Rithmus21'(1921)나 Viking Eggeling 의 ''Symphonie Diagonale'(1921)의 절대 예술지상주의 영화에 영향을 미쳐 파리의 전위예술 영화의 중심적 역할을 하게 한이유이다. 이런 류의 극영화로는 프랑켄쉬타인의 원형인 진흙으로 만든 괴물에게 생명을 불어 넣는 'TheGolem'(1920) 과 드라큐라 전설의 원형인 흡혈귀의 이야기'Nosferatu'(1922)가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표현주의적 무대장치와 연관하여 상기해야할 주요 영화들을 지명할 필요가 있다. 건축학적인 무대장치와 꼼꼼한 의상, 낭만적인 조명과 군중씬 처리 등 무대연출에 있어서 Max Reinhardt 의 이론과 실험을 반영하는 역사적 신화적 영화이다. 이영화에서 역사는사실적이기보다 심리학적이며 극적인 차원에서 해석된다.미국의 대서사극 감독 Cesil B.De Mille 에게 영향을 미친Ernst Lubitch 의 화려한 스펙타클극 'Passion'(1920)과덜 대중적이지만 혁신적인 Fritz Lang 의 'Die Nibelungen'(1924)등이 그것이다.

이 밖에 표현주의적 성향과는 크게 관련되어 있지 않으나 영화기교에 있어서 진보적인 <실내극영화(Kammerspielfilm)>는 심리적인 차원에서 표현주의와 함께 이야기 될수 있다. 역시 라인하르트의 연극무대로부터 비롯된 이 형식은시공간과 행위가 일치된 영화로 하층민의 개인적심리학적인 내용 등을 포함한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갈리가리 박사"를 쓴 Carlmyer의 "The LastLaugh"(1924년)로 F.W.Murnau가 연출했다. 이 작품은 호화로운 호텔에서 자부심으로 근무하는 도어맨의 비애를 추적하고 있다. 이런 류의 실내극과 관련된 장르는<거리영화(Street Film)>로서 부르주아 생활로부터 떨어져나오는 하층 중산계급에 대한 개별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Karl Grune의 "The Street"(1923년)로 시작되는 거리영화는G.W.Pabst의 "The Joyless Street"등으로 알려진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독일의 표현과 영화들은당대의 사회적 현실로부터 탈피하여 심리학적인 차원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카메라테크닉이나 조명, 무대장치, 연기 그리고 대본 등에서혁신적인 기법을 창조하게 된 것이다. 이 점은 예술적 완성도를 통해 독일의 이미지를 세계에 과시하고자 하는독일정부와 일치되어 1917년 거대한 영화사인 UniversumFilm A.G.가 설립되고 독일의 표현과 영화는 국가적 영화로 성장하게 된다.

라. 소련의 몽타주 영화

소련 공산혁명 이후 레닌은 혁명을 신속하게 알리는 수단으로서 영화를 선택하였다. 새로운 공산정부를 수립하는데는 5년을 기다려야 했지만, 모든 산업의 국유화는 1919년에 가능하였다. 그러한 결과 설립하게 된영화학교 Moscow Institute of Cinematography는소련영화를 형성하는 데에 일익을 담당했다. 새로운 소련영화의 형성은 좌익과 우익의 창조적 진영으로 갈라져 있었다. 우익은 오래된 연극적 전통 속에안주하여 전통적 연극의 상류계급 대신에 인민들과 혁명군으로 대체시킨 인물들을 관습적인 방법과 형식으로 영화화하였다. 반면에 좌익은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혁신에 있어서 훨씬 급진적이었다.그 대표적 감독인 Dziga Vertov는 레닌의 충고에 따라기 록영화와 뉴스 릴에 열중하였다. 그는 <Kino EyeGroup(1919년)>의 창설과 <Kino-Pravda(1922년)>를제작하였다. 그 과정 속에서 "미국인 소방수 생활"을 만든 포토의 착상처럼 묵은 필름의 편집작업을 통해 새로운의 미들을 창출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훗날 SergiEisenstein의 몽타주로 발전된 맹아적 형태가 재공된 것이다. 에이젠스타인은 일본의 언어와 문화에서, 즉 상형문자와 가부키나 노의 무대에서 몽타주와 복합적인예술의 본질을 인식하였다. 동시에 Proletkult 극장의 무대디자인으로서의 활동은 19세기 인물중심의 연극에서 탈피하여 사회문제를 제시하는 연극을 알게 하여 그로하여금 <montage of attraction>을 창조케 한다.

그것은 관객들로 하여금 예정된 정서적 반응의 길을 따라가게하 는 기법이다. 그의 첫 영화 "Strike"(1925년)는 노동자를 집단적인 주인공으로 등장케 한 영화로 빠르고 리듬감있게 편집된 그의 몽타주 기술을 선보였다.다음 작품 "Potemkin"(1925년)의 오뎃사 계단의 장면에서 창출한, 카메라의 움직임 없이 보여준 영상의 운동성은 <montage of collision>의 진수이다. 이편집기법은 두 개의 쇼트가 연결(충돌)되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이다. 결국 관객의 지적자극을 추구하는<intellectual montage>를 개척한 그는 "Ivan theTerrival"(1958년)에 이르기까지 소수의 작품을 남기지만 형식주의자로 비판받고 소련 영화계의 일선에서 축출당하고 만다. 또 한 부류의 좌익영화 개척자로는 LevKuleshov와 V.I. Pudovkin이 있다. 그들은 몽타주 실험교실을 운영해 기술과 연기의 <constructive montage>를 창안한다. 에이젠스타인이나 프도프킨은 두 개의 어떤 필름이라도 함께 놓여지면 불가피하게 그 연결로부터 새로운 개념이창조된다는 사실에 일치하였다. 프도프킨은 쇼트들의 적당한 순서와 조합에 필요한 리듬을 발견하는 기술몽타주와, 어떻게 행동의 의미가 연상의 몽타주를 통해원래의 의미와 다른 것으로 변화할 수 있는가하는 연기몽타주를 발견한 것이다. 즉 그의 편집기법은 두 개의쇼트 결합을 통하여 의미를 더욱 축적해가는 구성적 편집이다. 이 기법으로 에이젠스타인의 지적 호소와는달리 정서 깊숙한 곳으로 침투하여

즉각적인 갈채를 받는"Mother"(1926년), "Storm over Asia"(1928년) 등 완성도높은 영화를 남긴다. 이들과 같은 서열에 등장하는 Alexander Dovzhenko는 특이한 이민족적인 신비한 요소를 지닌 그만의 몽타주 사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도브첸코 그는 씬 안에쇼트들의 관계보다 시퀀스 안에서 씬들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씬들 서로간의 관계는 불분명하고 모호하여<다층적인 영상(many layered imaginary)>을 추구하는데에 있어서 종래의 관습을 무시해 버린다. 그의 중요한세 편의 영화 "Zvenigora"(1928년), "Arsenal"(1929년),"Earth"(1930년)에서 보여주는 극도의 광각적인 롱쇼트들은 단일 프레임 안에서 변화해가는 그림처럼 전개되는 행동과 구성의 복잡함을 전한다. 또한 영원성과 불변의 의식을 전달하는 정지된 쇼트들은 프도프킨처럼 해설적이거나 에이젠스타인처럼 극적이지 않고 시적인 영상을 추구한다. 그는 국가의 도움으로 영화를 만들지만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휴머니즘에 젖어있었다. 결국 그의 시각적 서정주의는 <사회주의리얼리즘> 경향이 강화되었을 즈음에 이르러 도태되고 만다.이렇게 소련의 영화들은 이전의 어떤 나라의 영화들과는 달리 사회·정치적 목적을 띤 것으로 정부의 검열에 제한당한다. 영화사에 있어서 이러한 구체적 작품들이갖는 중요성은 굉장하지만 결국 소련 내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 주제와 기술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만 이루어져 왔다.

마. 프랑스의 예술영화

1920년대의 프랑스의 인상주의 영화예술가들은 필름다르의 연극적 전통이나 다른 나라의 상업적 성공작을 모방하는 프랑스 화제작 추세를 비난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Louis Delluc은 영화의 시각주의를 주장하는<Photogenie론>을 발표하였고 시네클럽 영화운동 조직을 통해 그의 이론을 실천에 옮겼다. 델뤽의 "Fievre"(1921년) 을 비롯하여 Germaine Dulac의 "La Fete espagnole"(1919년), Marcel L'Herbier의 "Eldorado"(1921년), Jean Epstein의 "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1928년) 그리고 Abel Gance의 polyvision이라 불리는 "Napoleon" 등을 만든 인상주의영 화감독 집단들은 카메라와 세트 구성을 주관적으로 사용하는 영화의 시각적 내용의 표현적 사용에 깊이 몰두하였다. 그들의 영화에는 소프트 포커스, 이중인화, 극단적인 카메라 앵글 등이 자주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인상주의 영화작가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그 이상으로 기술적이며 형식적 실험을 시도한 제2의 아방가르드그룹의 영화운동이 1925년을 전후해 시작된다.

델뤽과 Ricciottoo Canudo에 의해서 이끌어져온 시네클럽에서 그들은 특별한 프로그램이나 그들이 직접 만든 작품감상회를 통해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영상시를창 조하는 붐을 일으켰다.F ernand Leger의 "Ballet Mecanique", Antonin Artoud와 뒬락의 "The Seashell and Clergyman"(1928년), SalvadorDali와  Luis Bunuel의 "Un chien Andalou"(1924년) 등은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밖에 델뤽의 인상주의와는 다른 객관적이고 사실주의적인 인상주의의 충동은, 한 도시의각각 다른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행동을 연대기적으로 구성한, 의미보다 형식을 강조한 영화를 등장케 한다. 파리를 그린 Alberto Cavalcanti의 "Rien que les heures"(1926년)와 베를린의 모습을 담은 Walter Ruttmann의 "Berlin : Symphony of aGreat City"(1927년), 그리고 암스테르담에 대한 JorisIvens의 "Rain"(1928년)등은 1920년대말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영화가 종말을 고하지만 1930년대 유럽의기록영화로 전환하는 데에 기여한다.

유성영화시대 도래(1926년-1935년)

가. 영화의 대기업화

미국영화 초기의 모든 주요 제작사(에디슨,바이오그라프, 바이타그라프)들은 보수연합인 <The MotionPicture Patents Company>를 만들어 미국 영화계를 통제하려는 독점화 노력을 시도했다. 그러나 장편영화의 활성화에 따라 부상한 독립영화사들은 1908년에 설립된 트러스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1917년 반트러스트 소송에서 <활동사진 특허회사>는 법적으로 무효임을 선언받는다. 그 이후 독립영화사들은 트러스트의법적 교란과 집단폭력을 피해 제작의 중심지를 뉴욕에서후 일 헐리우드로 불리는 남부 캘리포니아로 옮긴다. 특허회사 소속의 영화사들이 도태되고 새롭게 지배 세력이된 독립제작자들, 새로운 제작중심지 헐리우드 그리고 뉴욕으로부터 통제되는 배급과 더불어 1920년대와 그이후의 영화산업 팽창이 예고된다.1920년대에는 많은 회사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메이저 스튜디오로 발전한 기존의 독립영화사들은 심한 경쟁을하고 있었다. 1924년 설립된 영화합병회사인 <M-G-M>을비롯해 <Universal>, <Warner Brothers>, <Paramount>,<Columbia>, <United Artists>, <William Fox FilmCorporation>등은 유명배우를 고용하거나 배급흥행 통로를 확장시켜 경쟁회사를 매입하는 데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영화사의 공개주식 발행은 월스트리 의 성과를 높여주게 된다. 1920년대의 흥행 주도권 싸움은 파라마운트와 M-G-M의 설립회사인 <Loew's Inc> 그리고<First National>가 평정하여

1948년 연방법원의 위법판결을 받을 때까지 소수의 거대회사(결국메이저회사)에 의한 제작, 배급, 상영 즉 수직적 통제가 지속된다.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은 산업붕괴의 시기였지만 영화는 대중문화의 살아있는 형태로 지속된다. 이때의 미국 오락영화는 고전적 헐리우드 영화라고 불리는 기본적인 기술이 정착되었다.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전문가적 역량을 쌓은 감독, 배우, 기술자들의 명부를 확보하고 각 스튜디오의 특색을 만들어가는 스튜디오의제작시대에 돌입한다. 그들은 <Motion Picture Producersand Distributors of America(지금은 "Motion PictureAssociation of America")라는 대표기구를 만들어 세계영화산업을 지배하였다.1920년대의 미국영화산업은 <위대한 희극의 시대>였다. 채플린의 "The Gold Rush"(1925년), 키튼의 "The General"(1927년), Harold Lloyd의 "SafetyLast"(1925년), Harry Langdon의 "Tramp, Tramp,Tramp"(1926년)등의 희극과 더불어 독보적인 서부극은 그당시 대표적인 미국영화 장르이다. James Cruze의 "TheCovered Wagon"(1923년), 포드의 "The IronHorse"(1924년)는 전형적인 미국적 신화를 표현한 서부극이다. 이밖에 사회·도덕적 관심사는 <ProblemPicture>와 1920년대 현대인 재즈세대를 다루는 데밀의 시도로 <Depression Films>에서 다소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여성영화, 전쟁영화, 기록영화, 액션모험영화, 사극영화등 각각의 장르가 대량제작과 대중의 요구에 의해 생겨났지만 주요 감독들의 노력에 의해 발전되어 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 사운드의 도래

영화의 대부분 기술적 혁신과 마찬가지로 사운드도 처음부터 실험이 계속되었다. 뤼미에르가 영화를 최초로 공개하기에 앞서 에디슨의 조수 딕슨은 거대한 축음기의 나팔을 통해 연주되는 바이올린에 맞춰 춤추는 모습을이미 선보였다. 그리고 극장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증폭의문제는 1914년 거대한 스피커를 제작한 Lee de Forest의 진공관 개발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 소규모의 제작회사였던 워너 브러더스사는 1926년 8월 "Don Juan"이라는 무성영화 사운드트랙을 첨가하여 개봉하였다. 이 기기는 1925년 바이타그라프사를 인수함으로써 <Vitaphone system>이라고 명명된다. 네번째 바이타폰 영화로서 "Jazz Singer"(1927년)는 종래의 음악반주에다 약간의 음향효과가 첨가되는 것보다 더발전적인 발성영화였다. 그것은 노래와 대사의 삽입이었다. 이 작품의 확실한 성공은 새로운 드라마의 영역을 제시한 사운드의 탄생을 알리게 된다. 사운드의 탄생은 산업에 있어서나 예술에 있어서나 어느정도 혼란스런 상황을 연출하였다. Ernest BettsHeraclitus는 '사운드를 수용한 헐리우드는 치명적인자멸을 자처했으며 웅변적이며 생명과도 같은 침묵의 영화정신은 파괴되었다'고 시각예술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채플린은 "The Great Dictator"(1940년) 이전에는 한편의 발성영화도 만들지 않은 극단적인 고집을 보여주었다. 사운드의 참가가 영화의 실생활 묘사를 생동감있게 만들어 주었지만 그대신 초창기 영화가 탈피하고자 했던 기록된 연극으로 회귀시킨다. 소리의 첨가로 생겨난 새로운 리얼리즘은 일종의 미학적 위험성 을제공한 것이다.1930년초부터 유성영화의 기술적인 문제가 해결 되었는데 그것은 유성영화가 무성영화의 움직임과 대사에의 의존도의 축소 그리고 시각적 풍부함을 획득하는 것이었다.1932년부터 시작된 후시녹음의 기술방식은 1935년옵티컬 사운드 녹음의 충실도를 이루어 영화예술적 성숙도를 이루게 된 것이다. 포드의 "TheInformer"(1935년)는 영상과 편집의 리듬을 강화하기 위한사운드의 사용이 시각적 힘을 근본적으로 어떻게 증가할수 있는지 실천적이고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무성영화에서 이루지 못한 감각적이고 상징적인 풍부함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끌레르의 "Sous les toits deParis"(1931년), 히치콕의 "The Thirty-nineSteps"(1935년), 폰 스턴버그의 "The BlueAngel"(1930년), 랑의 "M"(1931년). 파브스트의 "TheThree Penny Opera"(1931년) 등 100% 말하는 완숙한 발성영화가 만들어졌다.새로운 사운드 매체와 함께 출현한 1930년대의 특징적인 장르는 뮤지컬, 갱영화, 공포영화, 발성희극영화, 만화영화 등이다.

뮤지컬과 갱영화는 워너사의 주작품으로 그 원형인 <revue>에서 초기의 뮤지컬<operetta>를 거쳐 "42nd Street"(1933년)와 같은 춤과 이야기가 있는 오늘의 뮤지컬로 발전한다. 갱영화는1920년대에도 만들어졌지만 1930년대의 산물로르로이(Mervin Leroy)의 "Little Caesar"(1930년)에서 시작된다. 유니버설의 특기인 공포영화는"Frankenstein"(1931년)을 대표작으로 사운드의 출현보다 독일에서 유래된 조명 기술을 미국인이 습득함에 따른 결과라고 보여진다. 루비치의 "Trouble inParadise"(1932년)에서는 영상과 소리가 대위법적으로연결 되었고 최초의<screw-ball comedy>인 Frank Kapra의"It Happened One Night"(1934년)는 미국적인 풍미로 가득차 있다.그러나 1930년대의 희극은 단편 만화영화의 출현에 밀리기 시작한다. Walt Disney의 "SteamboatWillie"(1928)는 동시 녹음된 최초의 만화영화로 그림보다 소리에 많이 의존한다. 음악을 강조한 "SkeletonDance"(1929)와 더불어 시작된 <silly symphonies>의차용은 음악이 스크린의 영상과 정확히 들어맞는 양식의 영화라는 <Mickey mousing>용어를 만든다. 엉터리 교향악은 최초의 장편만화, 사실 뮤지컬 만화영화인 "SnowWhite and the Seven Dwarfs"(1937)의 등장기 이후까지 일반화되었다.

영화산업화시대(1936년-1945년)

가. 프랑스영화의 전성기

사운드가 처음 프랑스에 소개되었을 때 막대하게 증가된 제작비용으로 가장 큰 두 영화사 <Gaumont Company>와<Pathe Freres>만이 새로운 매체를 이용할 수 있었다.그러나 자산을 과도하게 확장한 두 회사가 붕괴된 후상황은 일반 영화제작사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바뀌었다.그 결과 변화된 예술의 발전과정에서 상당한 실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장편 발성영화는 회화 예술적 전통 및 아방가르드적 무성영화 제작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문학적,연극적 자원들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었다. 소설은 발성영화의 양식과 밀접한 리얼리즘으로 Stendhal,Balzac, Flaubert, Zola, de Maupassant의 작품들은 그당시 주요 경향을 대변한다. 1930년대 후반의 프랑스영화는 그러한 전통 위에서 Marcel Pagnol, Charles Spaak등의 시나리오를 통해서 파악된다. 도시노동계급이나 지방을 무대로 폭력과 범죄를 다루지만 그것은 증오나 탐욕보다는 프랑스적인 열정으로 세부적인 사항들이 구석구석까지 표현된다. 심리적인 깊이와 세밀한 성격묘사에 뛰어난 프랑스 영화들은 연극무대에서 훈련받은 배우들을 무성영화보다 발성영화에 더 필요로한다. 프랑스 극단들은 세계에서 탁월한 연기자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우리는 Jean-Louis Barrault, JeanGabin, Louis Jouvet등의 세기의 배우들을 기억한다.
시나리오 작가와 연기자들의 공헌에 많이 의존하여 온1930년대 후반의 프랑스 영화는 <poetic realism>이라는 양식을 확립한 Jacques Feyder의 영화로부터 시작된다.

연극연출로 시작한 노련한 상업영화 감독인 그는 "Pension Mimosas"(1935)로 1930년대 후반의 지배적인 경향인 시적리얼리즘의 원형을 보여준다. 그의 역작인 정치적 암시를 제공한 "Carnival in Flanders"(1935)는 남성과 여성사이의 경쟁에 대한 희극이다. 보다 일관된 시적 리얼리즘을 추구한 Julien Duvivier는 도피라는 주제를 담는 일련의 영화를 만드는데 "Carnet de Bal"(1937)은과거의 기억으로부터의 도피를 그리고 있다. 프랑스의 가장 뛰어난 영화감독  Jean Renoir는 프랑스영화 전성기이전부터 "Toni"(1934)를 통해 사회적 단위의 단결력을 추구한 그의 세계관을 명백히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제는 더욱 세부적이고 절제된 형식으로 "The Crime of MonsieurLange"(1936), "The Grand Illusion"(1937), "The Rules of the Game"(1939)등에서 영화는 삶 자체는 아니지만 르누아르는 인간의 삶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 이밖에 독특한 지방색을 드러낸 빠뇰의 "The Baker's Wife"(1938)와 시적 리얼리즘의 전형을 완성한 MarcelCarne의 "Quai Des Brumes"(1938)는 사회를 향한 어둡고 절망적인 그들의 시각을 일관성있게 보여준 작품으로 유명하다.

나. 영국의 기록영화 전통

영국의 영화산업은 철저히 미국인에 의해 지배되고있었다. 배급되고 상영되는 오락영화는 대부분 미국영화였다. 1930년대 영국의 논픽션 영화는 어떤 특별한 종류의 우수성을 이룩해 냈는데 예술의 사회적 유용성이라는 1930년대의 지식인과 국가 이상에 맞아 떨어졌다. John Grierson은 영국 기록영화의 기초자이며 선구자로, 짧은 <film of fact>를 사회적이며 과학적인조사연구의 도구로 자리잡게 하였다.제2차 세계대전시 영국 기록영화의 전통은<semi-documentary>라 불려지는 장편이면서 구조상 이야기체인 새로운 영화 형식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들은전쟁 그 자체를 소재로 삼아 승리와 패배, 삶과 죽음사이의 궁극적인 극적 갈등을 대표적 사건으로 재현하면서 보여준다. 그 원형은 <Crown Film Unit>가 제작한 HarryWatt의 "Target for Tonight"(1941)이다. 그리고 상업적인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최초의 세미 다큐멘터리는 DavidLean과 Noel Coward가 감독한 "In Which WeServe"(1942)가 있다. 이후 전쟁의 와중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미개척 오지를 횡단하는 괴로운 소몰이의 이야기를 다룬 와트의 "TheOverlanders"(1946)까지 20여편의 세미 다큐멘터리가 제작된다. 이들 작품 중에서 가장 야심작인 Pat Jackson의"Western Approaches"(1944)는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으며 미국으로부터 북대서양을 가로질러 항해하는 영국상선과 경호함의 이야기를 다뤘다. 규모와 기술적인 면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이 작품은 세미다큐멘터리의 한계를 넘어서서 액션 멜로드라마로 착각케한다. 잭슨은 기록영화의 제작목적, 주제, 방법 그리고 결과로서 생기는 양식을 극화하는 정도는 어디까지인가의문을 제기한다. 그 질문은 문제영화의 발전과 이탈리아네오 리얼리즘 그리고 <Ending Studio>에서 나온 영국코미디를 예견하고 있다.

다. 영화검열과 미국 영화산업 변혁

전시의 헐리우드 영화들은 1940년대 후반부의 서곡이라기 보다는 1930년대의 희극물, 가벼운 로맨스나 가족드라마 그리고 뮤지컬이 계속되는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 점은 전쟁에 대한 언급이 적당히 가미된 Michael Curtiz의 "Casablanca"(1943)에서 그 두드러진 좋은 예를 보게 된다. 반면에 Orson Welles의 "CitizenKane"(1941)과 "The Magnificent Amberson"(1942)은 영화예술의 발전에 혁신적인 공헌을 했다는 점에서 그시대를 뛰어넘는 명작으로 남는다. Preston Sturges의사회풍자물 "Sullivan's Travels"(1941)같은 작품들은
전시의 현실에 의해 강화된 전쟁을 직접적으로 취급한 작품들과 함께 전후의 리얼리즘을 예고한다. 전쟁기간 중 최고의 흥행기록으르 남긴 영화 중의 하나인 르로이의 "Thirty Seconds Over Tokyo"(1944)는 유일하게 미국의 전쟁개입을 직접적으로 다루었다. 대다수의 미국영화는 오락적이거나 전쟁에 대한 충고적인 내용을 전달했다.전시의 애국주의와 건전주의의 와중에서 반대세력의 존재를 제공하는 Billy Wilder의 "Lost Weekend"(1945)는심리적 이탈과 정신이상에 관한 어두운 멜로드라마의 인위적인 영상양식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관심을 끌게 한다. 그것은 독일영화의 영향과 프랑스의 <filmnoir>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Robert Siodmak의 "TheSpiral Staircase"(1945)와 랑의 "ScarletStreet"(1945)등 헐리우드의 뛰어난 감독들은 필름누아르에 몰입하게 된다.

1940년대 후반 히치콕이 만든일련의 작품은 물론이요 사설탐정물, 갱영화, 전쟁영화에까지 파급된다. 미국영화의 특징중 하나인 범죄와 폭력은 인기 있는 미국영화 장르가 소유하는 권한이다. 실제 미국이라는 나라가 범죄와 폭력이 많은 나라로 알려지고 묘사되고 있지만, 사실 영상은 권선징악이라는 규정의 전면적인 주장에 의해 왜곡되고 있었다. 십계명처럼 그 규정의언어는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어떤 것이 어떻게 다루어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제한들이 법률, 섹스,천박함, 외설, 불결함, 의상, 무용, 종교, 장소(즉 침실),민족감정, 제목, 불쾌한 소재들 등 12개의 주요 표제하에서 다루어진 것이다.이 규정들은 1차대전 바로 직후 자기규제로부터시작되어 1930년 S.J.Daniel Lord 신부에 의해 초안된 문서이다. 이 문서는 미국영화 제작업자와 배급업자들이 공화당 의장을 역임한 바 있는 Will H. Hays를 제작규정 소장으로 추대하여 그가 서명하도록 했다. 그것은 대중들의 비판과 검열법을 통과시키는 주들이 늘어남에따라 <production code>로서 1968년 관객의 입장을 통제하는 규정을 채택할 때까지 지속된다. 헐리우드가 스스로 규정한 사항을 지키지 못한 것에 분노한 카톨릭 세력들은 <Legion of Decency>를 결성하여 규정을 위반한 영화들은 상영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규정 속에서 일하는 감독들은 그들이 보여줄 수 없는 것을 암시하려고노력한다. 성적인 것에 대한 규제가 큰 만큼 섹스는 폭력으로 대체하게 된다. 그 결과 미국의 인기있는 장르는 폭력과 범죄로 감싸게 된 것이다.

네오리얼리즘 유행시대(1946년-1955년)

가. 네오리얼리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보다 생생하고 감동적인 영화들이 출현한다. 르누아르 사상에큰 영향을 입고 귀국한 L. Visconti가 연출한 "Ossessione"(1942)이 전문잡지 <Cinema>에 기고되면서 네오리얼리즘이란 용어가 소개된다. 혹자는 1943년Umberto Barbaro 교수가 <시네마>에서 사용한 것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네오리얼리즘을 전후의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하듯이 Roberto Rossellini의 "Open City"(1945)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 사조는 파시스트 정권의 몰락과 전쟁의 좌절감과 굴욕감에서 벗어나게 되는 탈출감으로충만하게 된다. 로셀리니의 "Paisa"(1947), V.Desica의"Shoeshine"(1946)과 "The Bicycle"(1948) 그리고 기록주의적 스타일인 L.Zampa의 "Live inPeace"(1946) 등은 그당시 보아온 줄거리 위주의 표현양식과는 현저히 다른 새로운 영화기법을 제시한 것이다. 네오리얼리즘의 특질은 카메라와 현실세계와의 직접적인 접촉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있는 그대로의 일상적인 현실성, 나아가서 기록적인 새로운 미학을 창조한다.전쟁의 파괴, 살상, 레지스탕스의 투쟁, 빈곤, 실업,패전등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눈앞에 벌어진 현실 속으로 카메라는 파고들어 그 현장의 진실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연출 면에서도 시간적으로 긴 쇼트와 깊은 공간, 중심을 갖지 않은 구도(즉 주인공이 민중)를 구상하는 특색이 있다. 드라마 전개상 스토리를 거부하고 뉴스영화 스타일의 에피소드 전개와 작가의 현실에 대한정치적·사상적 입장과 관련된 영화적 표현을 추구한다. 카메라가 드라마의 틀을 파괴하기 위해 작가의 주체적 참여를 허용하는 것이다. 네오리얼리즘의 주류는 데시카의 "Umberto D"(1952)를마지막으로 10년이 못되지만 그 이후의 새로운 이탈리아영화는 인간의 내면세계에 초점을 맞춰 네오리얼리즘을수용한다. 현대인의 의식방황이라든가 고독한 영혼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세밀하게 묘사하는 새로운 영화정신이 새세대의 감독군에 이어진다.

나. 헐리우드의 리얼리즘

미국영화에서 리얼리즘적 접근은 사회문제를 주제로삼는 <Problem Picture>로 대변된다. 1950년대 초까지 계속된 이 경향은 철저한 반공주의인 MacCarthyism의 정치적 반발로 중지된다. <문제영화>는 현실적인 문제들의어떤 점을 파악하기 시작했을 때 폭로성향이 강하데 드러났다.재향군인이 도시생활에 재적응하는 과정을 그린 WilliamWyler의 "The Best Year of Our Lives"(1946), 미국내의 반유태주의를 그린 Elia Kazan의 "Gentleman's Agreement"(1947), 미국 정당정치의 기능을 다룬 카프라의"State of Union"(1949), 전쟁에 참전한 부상병들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그린 Fred Zinnemann의 "TheMan"(1950) 등의 작품은 사실을 토대로 한 그들 내부의 이야기다. 미국사회에 존재하는 불의와 불공정을 너무 지나치게 묘사한 <문제영화>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는 무렵의 1952년은 헐리우드의 대변혁이 시작된 해이다. 검열로부터의 자유와 탈 스튜디오 제작화 그리고 일관적 제작지배의 횡포로부터의 자유는 메이저의 몰락과 새로운 독립영화사의 성장을 가능케 했다. 동시에 텔레비전의 활성화는 영화관객의 급격한 감소를 초래했고 헐리우드는 새로운 영화 메커니즘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입체화면과 와이드스크린, 스테레오사운드와 보다 실용적이고 값싼 컬러(이스트만)가 등장했다. 때를 맞추어 해외에서의 미국영화제작과 해외영화 수입의존도가 높아지기 시작한것은 다른 상업처럼 다국적 기업에 상응하는 형태로 미국영화산업을 변혁시켰다.

다. 아시아영화

동양영화에 대한 서구인들의 지식은 세계영화제를 통해 얻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구로사와 아끼라의 "라쇼몽"(1950)이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획득한것 은 일본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를 대변하게 된다.이어서 1956년 깐느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획득한 사티야지트 레이의 "Pater Panchali"(1955)는네오리얼리즘을 수용한 민족주의 영화를 통해 인도를 알린다. 이후 1975년 홍콩의 King Hu가 감독한 "A Touchof Zen"이 깐느에서 대상을 탈 때까지 일본과 인도영화만이 아시아영화를 대표하게 되며 그것은 네오리얼리즘적 경향의 민족주의적 특성을 보여주는 작품에 국한되었다. 일본의 영화산업은 몇 개의 주요 제작회사가 배급과극장망을 지배하는 미국 영화산업과 유사하다. 일본영화는아끼라 작품을 제외하고 보통 서구영화보다 속도가느렸다. 양식이나 연기에 있어서 연극전통에 의존하고있는 대부분의 일본영화는 시각적인 특징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네오리얼리즘과 거리가 있다. 구로사와 외에미조구찌 겐지와 오즈 야스지로는 해외에서 지속적인 평가를 받아온 1950년대 감독으로, 그 전통을 이어받은 이찌가와 곤, 고바야시 마사끼, 오시마 나기사는 사회비판적 요소를 다루고 있다. 인도의 경우는 영화산업이 하나의 거대한 산업으로서 존재하고 있으며, 매년 제작되는 영화 편수에 있어서 일본 다음이다. 영화제작은 봄베이, 마드레스에서는 힌두어로 제작하고 캘커타에서는 뱅갈어로 영화를 만드는 복잡한양상을 보인다. 내용 면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신화와 판에박힌 연애 이야기에 기초하여 오락영화로서 한계를 갖고있다. 레이는 인도의 네오 리얼리스트도 뱅갈의 플라허티도 아니다. 그는 인도의 문화적 사회적 전통과 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그는 인도영화의상업적인 주류와 관련하여 <New Indian Cinema>, <Parallel Cinema>를 개척한다. Mrinal Sen과 RitwikGhatak 등은 새로운 인도영화 부흥에 참여한 감독들이다.

누벨바그의 새로운 영화기(1956년-1965년)

가. 영국의 프리시네마

세미 다큐멘터리가 종전 직후 거의 희귀한 것으로 지하에 숨어버린 대신, 기록영화 전통과 많은 공통점을가 진 Ealing Comedy가 가장 영국적인 영화로 전후 영국사회에 등장한다. 국가적 생존의 특별한 단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인 특징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주제를 다룬 일링 코미디는 특별한 희극적 양식을 갖는다. 그것은 주제를 위해 다룬 소재를 부조화와 과장을 통해서 표현한다. 무표정한 얼굴의 심각성, 내밀한 행동,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내뱉는 대사 등이 그 기법이다.그러나 고유한  영국영화 제작방식에 대한 불만은 1956년<Free Cinema>라는 기치 아래 세 편의 단편영화를국립극장에서 상영한다.Lindsay Anderson의 "O! Dreamland"(1954)는 바닷가 유원지의 무미건조한 인공적인 오락에 대해 혹평했고Karel Reisz와 Tony Richardson 의 "Momma Don't Allow"(1955)는 10대 노동계급이 고객인 런던 재즈클럽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Lorenza Mazetti와 Denis Horne은2명의 농아 부두노동자들이 겪는 정서적으로 메마른 삶을묘사한 "Together"(1956)등은 그들의 주장처럼 철저히 개인적인 영화로서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뢰를탐 구하였다.<New Left>라고 호칭되는 프리시네마 운동은 유럽대륙의 좌파와 유사한 것으로 영국식 누벨바그는 아니지만 영화사에서 매우 특징적인 공헌을 했다. 결국 프시네마정신은 리차드슨의 "Look Back in Anger"(1959)와 더불어시작된 주목할만한 장편영화들의 등장을 촉진시켰다.

나. 프랑스의 누벨바그

작가주의라는 비판적인 배경이 구성되는 동안 프랑스영화산업은 새로운 부류의 영화감독에게 호의를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결과 1959년부터 1960년 사이에67편이나 되는 영화를 만들었고 1963년까지 무려170여명의 감독들이 새로운 영화를 만들었다. NouvelleVague라는 용어는 한 신문기자에 의해 불려지기 시작했고그 말은 공통점이 없었던 다양한 감독들을 응집시켰다.그들 프랑스영화의 새로운 세대들은 지금까지의 제작양식을 바꾸어 스토리나 드라마보다 현실과 카메라가부딪치는 행위를 중요시하고, 다양한 영상의 표현기술을 시도하여 영화세계를 개념적인 드라마 밖으로 확장시켰다.이들은 영화를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지만<Cinematech>에서 영화를 계통적으로 훑어보고 <Chaiersdu Cinema>지에 비평의 글을 쓰면서 영화를 습득했거나 다큐멘터리 출신들의 감독 군들로 구성되었다. 이 시대에 등장한 Nouveau Roman은 누벨바그의 서술구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누벨바그의 원점은 Jean Pierre Melvielle의 "LeSilence de la mer"(1948)라고 하나 본격적인 작품은Louis Malle의 "L'a Scenseur pour l'echafaud"(1957)나Claude Chabrol의 "Le Beau Serge"(1959)라고도 한다.그러나 누벨바그를 세계에 본격적으로 알린 작품은 1959년깐느의 그랑프리를 획득한 Francios Trauffaut의 "LesQuatre Cents Coups"와 국제비평가상을 수상한 AlaineRenais의 "Hiroshima Mon Amour"이다. 이밖에 Jean-Luc Godard의 "A Bout de Souffle"(1960)은 누벨바그 시대의개막을 힘차게 알렸다.

다. 시네마베리떼와 디렉트시네마

사실주의에로의 접근에 있어서 두가지 전통은 다큐멘터리와 리얼리즘으로 일컬어지는데 1960년대에이르러 간편한 촬영기자재의 등장은 새로운 사실주의 기법을 개발케 한다. 프랑스의 Cinemaverite와 미국, 캐나다의 Direct Cinema는 종래의 다큐멘터리가 주도한교육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체제를 거부하고 사회적이며 현실적인 제문제에 눈을 돌렸다. 두 양식은 영화 기술적인차이는 거의 없으나 굳이 지적하자면 대상을 포착하는 방법론에서 견해차가 존재한다. 그것은 대상물을 포착할때 시네마베리떼는 카메라와 마이크를 자연스럽게드러내나 디렉트시네마는 철저하게 감춘다.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영화혁명기(1966년-1975년)

가. 뉴아메리칸 시네마

미국의 1960년대는 연좌데모와 시위, 행진, 폭동 등에의한 시민권 운동과 군중시위 등에 의한 월남전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저항운동과 함께 소위 <Youth Culture>가 생겨났고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전통을 거부하였다. 이 시기의 정신은 <YouthFilm> 혹은 <Now Film>이라고 불리는 영화에 반영되었다.이 영화들은 구세대와 갈 하는 젊은이와 그들의 새로운 생활방식을 그렸다.이런 흐름은 간접적으로 Arther Penn의 "Bonnie andClyde"(1967)가 공개되면서 새로운 미국영화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Dennis Hopper의 "Easy Rider"(1969)는섹스와 마리화나에 빠져 덧없이 죽어가는 현대 미국젊은이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했고 Sam Peckinpah의"Wild Bunch"(1969)는 잔혹한 폭력의 묘사를 통해어리석은 베트남 전쟁에 휘말린 미국에게 교을 남긴다.그것은 정의와 휴머니즘의 대변자였던 미국의 개척정신을 냉소하는 것이다.새로운 영화의 모태는 1960년 9월 뉴욕에서<Independent Filmmaker>의 선언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들은 <New American Cinema Group>으로 자칭하고 영화창작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고 영화에 대한 검열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MPAA의 회장인 Jack Valenti가1966년에 발표한 영화등급은 적나라한 섹스묘사뿐만 아니라 잔혹한 폭력 등의 표현도 가능케 함으로써 새로운영화의 태동을 앞당겼다. 1967년 뉴욕타임즈(12월8일자)에 New Cinema가 등장한 이후 1970년 BobRafelson의 "Five Easy Piece"에 이르기까지 약 4년에불과한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흐름이지만, 그것은 헐리우드의 시스템을 새롭게 활성화시켰고 영화가 다시 대중오락매체로서 자리를 복권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나. 뉴이탤리언 시네마

새로운 이탈리아 영화들은 그 서술구조 면에서 프랑스 누벨바그를 따르나, 시간과 공간을 비현실적으로 다루는순수 영화적 방법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Federico Fellini를 제외한 이탈리아 감독들은 프랑스 영화가즐기는 매체의 자의식적인 유희에 탐닉하지 않는다.네오리얼리즘에 뿌리를 두고 있는 새로운 이탈리아 영화의 감독들은 관심의 대상을 하층계급에서 상층계급으 로옮기는 큰 변혁을 보여준다. 그것은 전후 복구된 이탈리아의 경제적 기적이 전혀 무의미한 쾌락주의자들을 양산했음을 시사하며, 영화는 집단적인 상황보다는 개인적인 심리와 새롭게 변환된 도덕적, 정신적인 상황에 관심을 기울인다. 비스콘티는 네오리얼리즘의 이론과 실천을 창시한 감독의 한 사람으로서 그가 죽기 직전에 남긴"Conversation Piece"(1975)는 현대의 정치적, 사회적현실의 천박하고 급박한 일과 예술애호가, 귀족지식인들에대한 만평을 그린다. 펠리니는 주목할만한 네오리얼리즘 영화대본을 쓴 작가인데, "La Strada"(1954)는 새로운영화의 전환점으로 그가 추구한 것은 주관적이고 환상적인 개인의 이야기이다. "8 1/2"(1963), "Casanova"(1976)는성적인 공포와 욕망을 숨김없이 보여준다. M.Antonioni는펠리니의 유쾌한 자극이나 눈요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그의 "L'Aventura"(1960)이나 "The Red Desert"(1964)그리고 "The Passenger"(1975)등에서 에로티시즘을 통한의사소통을 즐긴다. 그는 화면구성이나 배우와 카메라의움직임. 세팅, 조명방식을 통해 영상과 스토리텔링의 다의성을 창조하였다.

다. 동유럽영화

공산국가에서 유일한 영화미학은 <사회주의리얼리즘>으로 관객들의 사회적, 정치적 태도들에 미치는 영화의 효과는 국가에 의해 영화의 내용이 조사되고 통제된다. 이러한 체제의 여건을 피하면서 동시대의 서부유럽 영화인들의 작품과 거의 유사한 구조와 양식을수 용하여 강한 개인적 상상력을 표현한 소련감독 AndreiTarkovsky의 작품활동은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 영화의 변혁을 예고한다. 제2차 세계대전 전의 동유럽국가의 영화들은 해외에서관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양·질 면에서 크게 뒤떨어져 있었다. 종전 직후 공산정부가 들어서면서 소련에서 그랬던 것처럼 영화 제작의 새로운 기반조성이 형성되었다. 1940년대 말부터 동유럽 국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를 제작한 폴란드는 1952년 스탈린이죽고나서 민족적 정서를 표현하려는 욕구를 분출시키기 시작한다. Andrzej Wadje와 Andrzej Munk는 1955년부터 1956년 사이에 절정에 달한 폴란드 영화를 주도한다. 그이후 일어난 가장 전형적인 변혁의 작품은 Roman Polanski의 "Knife in the Water"(1962), "Tess"(1979)그리고 Jerzy Skolimowski의 "Barrier"(1966)는 극도의개 인적인 진술과 실험을 시도했고 벨기에에서 제작한 "LeDepart"(1967)는 누벨바그의 영향력을 암시하는 작품이다.1956년 헝가리 봉기로 민족영화의 만개가 일시적으로 중단된 헝가리 영화는 1964년에 이르러서야 <Academy of
Film and Dramatic Art>가 조직되어 새로운 시대가열린다. 봉기 이전에 만들어진 Zoltan Fabri의 "Merry GoRound"(1955)는 당시 만연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한계를 극복한 유머와 서정성이 독특한 작품이었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Istvan Szabo의 "25 Fireman's Street"(1974)는 헝가리 역사적 경험의 탁월한 만화경을보 여준다. Miklos Jancso의 "My Way Home"(1964)과 "TheRed and the White"(1967)는 헝가리 영화의 기치를 세계 영화계에 알린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헝가리의 혼란을 지켜보면서 자체 공산당에 의해 혼란을 자제한다. 국립영화학교 <FAMU>출신인 Milos Forman의 "The Fireman's Ball"(1967)은시네마베리떼적 양식을 사용한 영화로 진정 새로운 체코영화를 이끌어 가는 지도적 감독으로 자리잡는다.사실 체코영화가 해외에 알려진 것은 파시즘과 반유태주의와 대량학살을 폭로한 Jan Kadar와 ElmarKlos의 "The Shop on Main Street"(1965)와 소시민의 행동을 주의깊고 사심없이 관찰한 Jiri Menzel의 "CloselyWatched Trains"(1966)가 아카데미 영화상을 각각 수상한데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1968년 소련의 침공은 헝가리에서처럼 체코영화를 짓밟는 계기가 된다.동유럽국가들 중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일찍이 소련의세력권 안에서 탈피하여 유일하게 독자노선을 걷는 만화영화 산업이 발달한 나라이지만 <사회주의리얼리즘>의 길을 걸어왔다. 1960년대 후반에 가서야실험적인 성향이 강하고 유고감독으로 널리 알려진 Dusan Makavejev에 의해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다. 군사적, 정치적 사건이 군데군데 뉴스 릴로 삽입된"Innocence Unprotected"(1968)와 성욕과 개인이 직면한사회, 정치적 억압감을 그린 "WR : Mysteries of theOrganism"(1971)등 그의 작품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진영에 충격을 준다.

라. 뉴저먼 시네마

서독영화의 부활은 1962년 <아버지 영화>를 공공연히 비난하고 나선 <Oberhausen Film Festival> 이후 Alexander Kluge의 지도아래 나타난 일군의 젊은 감독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들은 일찍이 무르나우, 랑, 파브스트등이 독일영화에 부여했던 독일 민족주의적 그 무엇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클루게의 "The Part-time Work of a DomesticSlave"(1974)는 각자의 주어진 삶 속에서 어떤질서, 힘, 효용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을 29세의 여자를 통해 그렸다. 프랑스에서 망명한 Jean-Marie Straub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영화의 <minimalist>적 실험형식을 탐구한다. 그의 "History Lesson"(1973)은 고대 로마사의 일상적인 묘사에 기초한 경제적인 동기들에 마르크스주의를 부여한다. Reiner Werner Fassbinder는 부르주아의 태도를 비판하여 주변 여자들에 의해 죽을때까지 술을 마셔대는룸펜의 이야기를 그린 "The Merchant of Four Seasons"(1971)를 발표하고 WernerHerzog의 정치적 메타포인 "Even Dwarfs StartedSmall"(1970)은 그를 알린 최초의 작품이다. 신 독일영화가 국제무대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VolkerSchlondoff의 "The Tin Drum"(1978)과 Wim Wenders의미국에 대한 매혹인 "The American Friend"(1977) 그리고 Hans-Jurgen Syberberg의 "The Confession of Winifred Wagner"(1975)라는 7시간 길이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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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퍄노걸
My Favorite/Movies2004/09/16 14:57

* 황금사자상(1932-2003년)


2003년 Vosvra Cenie(귀환) -(러시아)
2002년 The Magdalene Sister-(영국)
2001년 Monsoon Wedding-(인도)
2000년 Dayereh- (이란)
1999년 Non uno di meno(한사람이 적지않다) - (중국)
1998년 Cosi ridevano(이렇게 웃는다) -(이탈리아)
1997년 Hana-bi(하나비)-(일본)
1996년 Michael Collins(미카엘 콜린)-(이란)
1995년 Cyclo(싸이클)-(중국)
1994년 Prima della Pioggia(비 오기전에)-(유고슬라비아)
1993년 Film Blu(블루필름)-(프랑스)
1992년 La storia di Qui Ju(큐주의 이야기)-(중국)
1991년 Urga, territorio d`amore (사랑의 땅, 우르가)-(소련)

1990년 Roscencrantz e Guildenstern sono morti(로센크란츠와 굴리덴스테른죽었다)-(영국)
1989년 Citta dolente (고통스러운 도시)-(타이완)
1988년 La leggenda del santo bevitore(성인 애주가의 전설)-(이탈리아)
1987년 Arrivederci ragazzi(안녕 소년들아)-(프랑스)
1986년 Il raggio verde(푸른광선)-(프랑스)
1985년 Senza tetto ne legge (지붕없이 읽지않음)-(프랑스)
1984년 L`anno del sole quieto(평화로운 태양의 해)-(폴란드)
1983년 Prenom Carmen(세례명 카르멘)-(프랑스/스위스)
1982년 Lo stato delle cose(어떤것의 상태)-(독일)
1981년 Anni di piombo(봉인의 해)-(독일)

1980년 Gloria-Una notte d`estate(여름밤-글로리아)-(미국)

1969년-79년 수상작이 없음

1968년 Artisti sotto la tenda del circo: perplessi(써커스천막속의 예술가들)-(독일)
1967년 Bella di giorno(아름다운 하루)-(프랑스)
1966년La battaglia di Algeri(알제리 전투)-(이탈리아)
1965년 Vaghe stelle dell`Orsa(오르사의 공허한 별)-(이탈리아)
1964년 Desert rosso(붉은 사막)-(이탈리아)
1963년 Le mani sulla citta(도시위의 산)-(이탈리아)
1962년 L`infanzia di Ivan(이반의 어린시절)-(소련)
1961년 L`anno scorso a Marienbad(마리엔베드에서 작년)-(프랑스)

1960년 Il passaggio del Reno(레노의 산책)-(프링스)
1959년 Il Generale della Rovera(로베라의 장군)-(이탈리아)
1958년 L`uomo del riscio(위기의 남자)-(일본)
1957년 Aparajito-L`invito (아파라히토-초대)-(인도)
1956년 수상작 없음
1955년 Ordet-La parola(오뎃트-말)-(덴마크)
1954년 Giulieta e Romeo(줄리엣과 로미오)-(이탈리아/영국)
1953년 수상작 없음
1952년 Giochi Proibiti(금지된 장난)-(프랑스)
1951년Rashomon(라쇼몽)-(일본)

1950년 Giustizia e fatta(정의와 일)-(프랑스)
1949년 Manon(마농)-(프랑스)
1948년 Sirena(씨레나)-(이탈리아)
1947년 Amleto(헬멧)-(영국)
1946년 L`uomo del sud(남쪽 남자)-(미국)
1945년-43년 전쟁중에 행사없었음
1942년 Il grande re(위대한 왕)-(독일) Bengasi(벤가시)-(이탈리아)
1941년 Ohm Kruger,l`eroe dei Boeri(보레이영웅, 오훔 쿠르저)-(독일) La crona di ferro(철왕관)-(이탈리아)

1940년 Il Postiglione della steppa(대초원의 마부)-(독일) L`assedio di Alcazar(알카자르 요새)-(이탈리아)
1939년 Abuna Messias(메시아 아부나)-(이탈리아)
1938년 Olympia(올림피아)-(독일) Luciano Serra pilota(파이롯트 루치아노 세라)-(이탈리아)
1937년 Carnet di ballo(무도회)-(프랑스) Scipione l`africa (아프리카의 어리석음)-(이탈리아)
1936년 L`imperatore della Califonia(캘리포니아 황제)-(독일) Squadrone bianco(백색군대)-(이탈리아)
1935년 Anna Karenina(안나 카렌니나)-(미국) Casta Diva(카스타 여신)-(이탈리아)
1934년 L`uomo di Aran(남자 아란)-(영국) Teresa Confaloniere (테레사)-(이탈리아)
1933년 영화제가 열리지 않음
1932년 공식적인 시상식이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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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NICE INTERNATIONAL FILM FESTIVAL


1. 연혁

1932년 무솔리니치하에서 비엔날레 행사의 일환으로 시작하여 1934년 연례 행사로 정례화 됨


2. 성격

미지의 영화들을 발굴하려는 의도로 알려지지 않은 걸작들을 소개하고 급변하는 사회 구조속에서 영화의 비교 및 연구를 통해 영화의 창조적 활동 및 발전을 장려하고 예술·오락적 요소를 갖춘 영화의 이해 및 보급 도모


3. 개최 장소 : 이태리 베니스(리도)


4. 개최 부문

ㅇ "Venezia 56" : 경쟁부문
ㅇ Cinema of the Present : 비경쟁부문(신인 또는 유명 감독의 작품으로 최근의 영화 제작에 대한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 소개부문)
ㅇ Dreams and Visions : 비경쟁부문(내용이나 형식에 있어 스펙타클과 창작성을 갖추고 있는 작품 소개부문)
ㅇ New Territories : 비경쟁부문(새로운 영상 언어를 연구한 Audio-visual매체 및 다른 매체로 제작된 전 세계의 모든 영화)
ㅇ Corto-Cortissimo : 단편경쟁부문(30분 미만의 단편으로 작품성, 창작성, 독창성을 갖춘 영화)

※ 심사위원 3인으로 구성, 은사자상(1편), Special Mentions(2편) 수여
ㅇInternational Critic's Week : 이탈리아 국립 비평가협회 (SNCCI)가 선정한 7편의 데뷔작품 시사부문(비경쟁)
ㅇVenice First Film Award : 동 영화제의 각 부문에 출품된 데뷔 작품 5 ~ 7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에서 1편을 선정 현금 지원
ㅇGolden Lion for Contribution to Cinema : 영화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판단되는 작품에 수여


5. 수상부문

ㅇ 최우수작품상(Golden Lion)
ㅇ 심사위원 대상(Jury Grand Prix)
ㅇ 최우수감독상(Special Prize for Best Director)
ㅇ 최우수여우상(Coppa Volpi for Best Actress)
ㅇ 최우수남우상(Coppa Volpi for Best Actor)
ㅇ 신인배우상("Marcello Mastroianni" Award for Best Young Actor or Actress)
ㅇ 이탈리아 의회 금상 :(Golden Medal of the Italian Presidenza del Senato)


베니스 영화제 (The Venice International Film Festival )

아름다운 수상도시 베니스. 매년 가을 이곳에서는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베니스 영화제가 개최된다. 비엔날레 프로그램으로 시작된 베니스 영화제는 무솔리니 시절 파시즘의 선전도구로 사용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2차 대전이후 예술성 높은 영화들을 옹호하며 작가주의 영화제로 자리잡는다. 87년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에 여우주연상을 수여해 한국 영화에 첫 3대 영화제 본상 수상을 영예를 안겨줘 우리에게도 친숙한 베니스 영화제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올해로 제 59회를 맞이하는 베니스 영화제는 전세계 수백개 국제영화제 중에 세계 최초로 개최된 국제영화제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이탈리아는 1932년 8월 베니스 비엔날레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국제 예술 영화제를 개최했다. 첫해에는 비경쟁 영화제로 치뤄졌던 베니스 영화제는 이듬해인 1933년에는 영화제가 열리지 않았고 1934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다. 영화제 조직위측은 '본 행사는 정치적인 성향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선언 했었으나, 무솔리니 집권시기의 베니스 영화제는 정치적 수단으로 변질되고 만다. 무솔리니는 지금까지도 메인 행사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팔라조 델 치네마를 짓는 한편, 영화제 대상의 명칭도 무솔리니 컵으로 하는 등 베니스를 철저하게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고 이는 프랑스에서 베니스 영화제를 견제하기 위해 깐느 영화제를 개최하게 만들기도 했다. 1937년도에 건축된 팔라조 델 치네마는 1100개 좌석의 살라 그란데를 포함, 살라 볼피, 살라 파시네티, 살라 조르지도 등의 극장이 포함되어 있다. 메인 상영관인 살라 그란데는 개막식과 수상식 등의 행사를 치루며, 팔라조 델 치네마에서 5분정도 거리에 1300석을 갖춘 현대식 영화관 팔라비엔엘이 비아 산드로 갈로에 설립되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43년부터 45년까지 행사를 치루지 못한 베니스 영화제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차츰 영화제의 기틀을 마련하며 최초의 세계 영화제에서 최고의 세계 영화제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초기에 심사위원단도 없이 최우수 이탈리아 영화와 최우수 외국 영화를 구분해 시상하던 베니스 영화제는 47년부터 대상의 이름을 황금사자상으로 바꾸며 이탈리아와 외국 영화의 구분없이 한편의 대상을 선정하는 본격적인 경쟁 영화제로 탈바꿈한다. 특히 1951년도에는 세계 3대 영화제 중 최초로 아시아 작품인 일본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에 황금사자상을 수여해 아시아 영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크게 기여를 하기도 했다. 53년도와 56년도에는 수상작 없음 결정을 내려 나눠먹기식 수상보다는 영화제의 권위를 높이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이반의 어린 시절>, 알랭 레네의 <지난 해 마리엥바드에서>, 질로 폰테코르보의 <알제리 전투> 등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영화들이 베니스 황금사자상 목록에 오르며 예술성 높은 영화를 옹호하는 작가 영화제로써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70년대 초반, 상업적인 개념을 타파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며 베니스 영화제는 모든 부문의 상을 폐지하는 변혁을 마련한다. 그러나 의도와는 달리 경쟁체제가 사라지자 영화제는 흥미를 잃게 되었고 이때부터 베니스 영화제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급기야 73년부터 78년까지는 영화제가 중지되며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79년도에 영화제가 재개되고 80년도부터는 다시 경쟁체제를 도입하며 명예 회복을 꾀하지만 이전의 명성은 쉽사리 회복되지 못한 채 깐느 영화제에 밀리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다만, 베니스 영화제는 80년대 이후에도 대만 후 샤오시엔 감독의 <비정성시>, 중국 장이모우 감독의 <귀주 이야기>, 일본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하나비>, 이란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순환> 등에 황금사자상을 수여하며 아시아 영화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왔다. 87년에는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에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한국영화 최초로 세계 3대 영화제 본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주기도 했다.

깐느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예술 영화를 옹호해오며 명성을 유지해오던 베니스는 80년 이후 마켓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넓혀간 깐느에 밀리며 예전의 화려한 명성은 조금 퇴색한 느낌을 주고 있다. 특히 90년대 이후 베니스 영화제가 개최되는 시기에 열리는 토론토, 밴쿠버, 뉴욕, 몬트리올 영화제 등 북미 지역에서 개최되는 영화제들의 위상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미국의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베니스 대신 이들 영화제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며 이러한 현상은 가속되기 시작했다. 이에 베니스 영화제는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며 예전의 명성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98년도에는 마켓 부문을 신설하기도 했으나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한 채 1년만에 중지되었고 이후 2000년도에는 기존의 경쟁부문을 베네치아 58로 이름을 바꾸고 새롭게 현재의 영화 섹션을 추가해 경쟁부분을 둘로 나누는 모험을 시도하는가 하면, 20년간 베를린 영화제를 이끌어왔던 모리츠 데 하델른 모리츠 데 하델른 전 베를린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새롭게 집행위원장으로 위촉, '전통과 새로운 지평과의 통합'이라는 모토 아래 영화제의 쇄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1932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개최된 베니스 영화제는 올해로 벌써 59회를 맞이하고 있다. 세계 3대 국제영화제 중 가장 오래된 영화제로써 베니스는 이제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이름의 영화제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베니스 영화제’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친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얼마 전 개막된 제 59회 베니스 영화제에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가 진출하면서 다시 한번 우리 곁에 다가온 베니스 영화제. 그 동안 베니스 영화제에 진출한 한국 영화는 어떤 작품들이 있었는지 한번 살펴보자.

한국영화와 관련해 베니스영화제가 한국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7년 제 44회 때다. 바로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에서 열연했던 배우 강수연이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사상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주요부문을 수상한 것이 최초였기 때문에 <씨받이>에 출연했던 강수연은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임권택 감독이 다시 한번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 영화가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것은 1987년 보다 6년이나 앞선 1981년. 바로 이두용 감독의 <피막>이었다. <피막>의 이두용 감독은 비록 본상은 아니지만 그 해 출품한 감독 6인에게 수여하는 ISDAP상 을 받는 영광을 누렸고 주연 배우였던 남궁원 역시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기도 했다(이두용 감독은 <피막>으로 세계에 알려진 후 3년 후인 1984년에는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우리나라 최초로 깐느국제영화제에 진출하기도 한다).

1987년 <씨받이>의 베니스 영화제 수상은 배우 강수연 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그 동안 아시아 권을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 영화가 국내 영화 산업의 발전과 해외 진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기 때문에…하지만 1987년 <씨받이> 이후, 몇 년간 베니스 영화제는 한국과는 동떨어진 먼 나라의 영화제일 뿐이었다. 한편 이 시기 중국을 비롯해 일본, 대만, 이란의 아시아 영화들은 베니스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 세계적인 주목을 끌고 있는 터라, 아시아를 대표하던 한국영화의 위상은 계속 하락할 수 밖에 없었다. 장이모우 감독이 <귀주 이야기>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대 이어, 대만 후 샤오시엔 감독의 <비정성시>, 일본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하나비>, 이란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순환> 등 아시아 영화들이 줄줄이 대상격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것. 1980년대를 거쳐 1990년 대까지 베니스 영화제는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 영화들의 장으로 변모한 것이었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년, 줄곧 영화제 변방국으로 남아있던 한국도 기회가 찾아왔다.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 이후 12년 만인 제 56회 베니스영화제에 드디어 한국 영화가 경쟁부문에 진출한 것. 그 영광은 바로 장선우 감독이 안았다. 국내에서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상영불가 판정까지 받았던 <거짓말>. 그러나 이 영화는 당시 집행위원장이었던 알베르토 바르베라의 지대한 관심을 받아왔고, 여주인공 김태연의 연기에 주목하고 있다고 밝혀 수상 가능성이 비춰지도 한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거짓말>은 단 한부문도 수상하지 못했지만, 56회 베니스 영화제는 한국 영화 역사에 있어 한 획을 긋는 자리였다. <거짓말>을 비롯해, 총 4편의 영화들이 베니스 영화제에 진출했기 때문. 전수일 감독의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와 임필성 감독의 <베이비>가 새로운 분야 부문에 진출했을 뿐만 아니라 1970년대 냉장고에 얽힌 달동네의 한 집안 이야기를 그린 안영성 감독의 단편 <냉장고>가 단편 경쟁부문에 올랐다. 이렇게 4편이 동시에 베니스 영화제게 진출하기는 처음이었기에 당시 언론에서도 베니스 영화제를 보다 많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1999년 <거짓말>에 이어 2000년 57회 때, 또 다시 김기덕 감독의 <섬>이 경쟁부문에 진출하자, 베니스 영화제는 우리에게 더 이상 먼 나라 영화제가 아니었다. <섬>뿐만이 아니라, 이상열 감독의 단편 <자화상 2000>과 하기호 감독의 <내사랑 십자드라이버>가 단편 경쟁부문에 진출하면서, 한국 영화에 대한 수상 가능성도 점쳐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감 뿐. <섬>의 공식 시사회가 끝난 후 반응은 매우 처참했다. 두 명이 영화 상영 도중 실신하는가 하면, 한 이탈리아 생물보호단체에서는 동물학대의 내용이 담긴 공연이나 영화상영을 금하는 이탈리아 형법을 내세워 <섬>의 상영금지 및 경쟁부문 출품철회를 영화제쪽에 요구했을 정도로 반응이 냉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해인 2001년, 제 58회 베니스 영화제에 <수취인 불명>이 2년 연속으로 공식 경쟁부문에 초청되면서 김기덕 감독은 베니스에서 주목 받는 감독 중 한명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20001년은 <수취인 불명>과 함께 디지털 영화인 송일곤 감독의 <꽃섬>이 주목을 받은 해였다. 새롭게 추가된 또 다른 경쟁부문인 현재의 영화 부문에 <꽃섬>이 진출하면서, 베니스에서 한국 영화의 위상을 한 층 끌어올린 것이다. 결국 <꽃섬>은 별도의 젊은 평론가 및 언론인들의 모임 ARCA에서 주최하는 관객들이 뽑은 데뷔 감독상 수상하면서 그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2001년은 또한 <수취인 불명>, <꽃섬>과 함께 단편에서도 우리 영화 3편(<숨바꼭질>, <노을소리>, <11세>)이 베니스 영화제 진출해 무려 5편의 영화가 베니스를 찾기도 한 해였다.

한국 영화가 4년 연속 경쟁부문에 진출한 59회 베니스 영화제에 비록 기타노 다케시, 샘 멘데스, 토드 헤인즈, 아그네츠카 홀랜드 등 세계적 감독들의 작품이 경쟁 상대로 올라 있다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 영화의 수상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는 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오아시스>가 작품성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으로 깐느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한국 영화가 세계적으로 인정 받고 있고, 또한 문소리, 설경구 등 주연배우의 연기 또한 세계 어느 영화에 뒤지지 않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21편의 경쟁작 중 <오아시스>가 대상을 타리라 예상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고 필자 역시 한국인인 점을 감안할 때, 단지 바람일 수 도 있겠지만... 마지막으로 <오아시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경쟁부문에 진출한 <화장실, 어디에요?>를 비롯해, 김곡ㆍ김선 감독의 <반변증법>과 손정일 감독의 <서브웨이 키즈 2002>도 좋은 성과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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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퍄노걸
My Favorite/Movies2004/09/16 14:52

 

한국영화 100년의 자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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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현찬 인터뷰 / '한(恨)과 저항의 우리영화 100년'

 

[인터뷰 / 호현찬 편 ]

호현찬(扈賢贊)...

1926년 대전에서 태어나 홍익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신문,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를 거쳐 한국문화프로덕션 대표, 영화진흥공사 사장, 한국공연윤리위원회 심의위원, 한국영상자료원의 원장 등을 역임했다.


특히 영상자료의 중요성을 역설, 오늘의 한국영상자료원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 <사격장의 아이들>, 이만희 감독의 <만추>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한국영화를 '한(恨)과 저항의 영화'라고 하는 그에게서 한국영화의 태동 및 발전의 역사에 대해 들어보았다.

 

 초창기 한국영화에 대하여

 

영화는 1987년부터 1903년 사이에 한국에 도래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서양의 선교사와 일본인 상인들에 의해 소개된 영화에 대해 충격과 경이로움으로 환호하였다. 신문 자료에 의하면 한국에 최초 공개된 활동사진은 1903년 동대문 내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상영되었다. 프랑스와 미국 등 서구에서 영화가 오락으로 대중과 호흡하였듯이 한국에서도 대중문화에 편입되어 오락으로 수용되었다. 관객의 호응은 높았지만 당시 한국 영화계는 자본의 부재와 제작 장비 및 기술의 미비라는 열악함을 면치 못하였다.


한국영화사에서 최초의 한국영화는 1919년 10월 27일 상영된 김도산의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를 정설로 삼고 있다. 이 영화는 일본 신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연쇄극이라는 장르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로 인해 조선총독부에서 저축 장려목적으로 만든 계몽영화인 윤백남의 <월하의 맹서>(1923)를 한국영화의 시초로 보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또 한편 1923년 1월 11일 상영되었다는 신문 기록이 남아있는 일본인 원산만 감독의 <국경>을 한국 영화의 효시로 삼자는 주장도 존재한다. 효시로 거론된 세 편의 작품은 모두 연쇄극 <의리적 구토>, 계몽영화 <월하의 맹서>, 일본인 감독 <국경>이라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나운규와 일제 강점기 한국영화

 

[이명우 감독 <춘향전>]

해방 전 한국영화사는 나운규가 중심에 존재했다. 춘사 나운규 만큼 대중의 사랑을 받은 영화작가는 드물었으며, 1902년 함경도 회령에서 태어난 그는 1924년 <운영전>에 단역 배우로 출현하면서 영화계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1926년 <아리랑>을 감독하였으며, <아리랑>은 네가 프린트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다만 나운규의 회고나 출연배우의 회고담을 통해 그 실체 확인과 평가 작업이 이루어져 왔다.


<아리랑>으로 한국영화에 대한 전 국민적인 관심이 집중되면서 1935년에는 한국인에 의한 촬영과 녹음 작업으로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인 이명우의 <춘향전>이 등장한다. <춘향전>은 1923년 일본인 하야가와 고슈에 의해 제작된 이래 2000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까지 십여 편이 제작되어 왔다. <춘향전>은 한국영화사에서 어려운 시기에 구원의 여신처럼 등장하였다.

 

 

<춘향전>, 한국영화의 활로를 열다.

 

[신상옥 감독 <성춘향>]
[이강천 감독 <피아골>]

1955년에 이규환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춘향전>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한국영화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61년에는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과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이 제작되어 1960년대 한국영화 중흥에 일조하였다. 이처럼 <춘향전>은 한국영화사에서 국민영화로 불릴만큼 지속적으로 제작되었으며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하고 관객의 사랑을 받아온 레퍼토리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영화를 통한 식민지 통제를 강화한 일본은 1940년 1월 조선영화령을 공포하여 ‘영화의 질적 향상과 건전한 발달 도모’를 명분으로 일본 선전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하였으며, 조선인들에 대한 내선일체 강조와 일본정책을 옹호하는 영화제작을 강요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국영화 제작자들의 자유가 박탈당했으며 영화인들은 어용 영화제작에 참여하거나 영화계를 떠나기도 하였다. 친일영화에 참여했던 감독들은 해방 후 독립운동가를 주인공으로 하는 항일영화를 제작하여 참회하거나 과거를 반성없이 망각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1950년대 한국영화는 1953년 휴전협정 체결 이후 위축된 한국영화를 재건하는 재건기로 볼 수 있다. 1950년대는 신상옥 감독의 <꿈>, 이강천의 <피아골> , 한형모의 <자유부인>이 제작되었으며, 멜로드라마와 전쟁영화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유현목, 이강천, 김소동, 윤봉춘 감독 등이 등장하여 활동하였다.

 

 거장들, 한국영화의 부흥기를 열어가다.

 

[김수용 감독 <갯마을>]
1960년대 한국영화는 양적인 풍요와 질적인 성장을 이루는 화려한 시기였다. 영화 제작 편수는 1960년대 후반에는 200편을 넘어서기도 하였다. 1960년대는 공영방송인 KBS와 동양텔레비젼과 MBC가 개국하여 TV시대를 열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신상옥, 유현목, 김기영, 김수용, 이만희로 이어지는 거장들이 활약하였다. 유현목 감독은 <오발탄>, <순교자> 등 자신의 대표작을 연출하면서 한국영화 황금기에 일조하였고, 김기영 감독은 <하녀>를 연출하였으며, 김수용 감독은 <청춘교실>로 청춘영화youth-pix 의 붐을 주도하였다. 당시 청춘영화는 신성일과 엄앵란이라는 스타와 '아카데미극장'이라는 상영관과 대학생이라는 고정 관객층의 형성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이만희 감독은 자신의 대표작 <만추>를 연출하였으며 신상옥은 <성춘향>과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제작하였다. 1960년대는 군사정권에 의해 국책영화인 반공영화가 제작되었으며 외국영화 수입권을 확보하기 위한 문예영화가 양산된 시기였다. 반공영화는 세계영화사전에서 찾아보기 힘든 한국적 영화장르다. 반공영화는 1961년 군사쿠데타 이후 반공을 국시로 삼는 정권에 의해 반공영화 장려책에 의해 제작이 독려되었다. 이데올로기면에서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공산주의자를 테러와 파괴를 일삼는 악당의 세력으로 재현하면서 서부영화의 구조와 동일한 선과 악으로 대립시켰다. 반공영화는 정책적 후원에도 불구하고 소재의 식상함과 관객의 외면으로 자체 소멸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1990년대 이후 남북화해 분위기로 인해 그 역할을 상실하고 말았다.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던 시대, 유신의 시절 1970년대

1970년대는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시기였다. 유신체제가 들어서면서 억압과 저항의 시기를 전개하였으며 영화산업은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핵가족화와 산업화라는 시대의 변화와 통기타, 포크송, 장발, 청바지로 대표되는 청년문화가 유입되었으며 30~40대의 주류 관객들이 극장을 외면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새로운 기수들인 하길종, 이장호, 김호선 등이 '영상시대'를 결성하여 새로운 영화를 연출하자 젊은 관객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되었다. 이만희와 하길종의 요절은 한국영화사에 큰 손실이었다.

충무로는 1960년대부터 영화인들의 활동 무대였다. 1950년대가 명동의 시대였다면 1960년대는 충무로의 시대였다. 충무로3가에 영화사들이 집결하면서 영화 제작자들과 감독, 그리고 배우들이 충무로에 몰려들어 영화인의 공간으로 정착했다. 한국영화 상영관도 역시 국도극장, 대한극장, 중앙극장, 명보극장 등 충무로 주변에 포진하면서 충무로 시대에 일조하였다.

 

 전환의 바람, 충무로에 불어오다.

[임권택 감독 <만다라>]

1980년대에는 제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반공영화, 새마을 영화가 퇴조하고 흥행을 담보로 하는 성애영화와 멜로드라마가 강세를 보였다.


1980년대는 정치 문화적으로 전환기였다. 1980년대는 금지곡이 해금되고 시나리오 검열 폐지, 외국영화 수입개방으로 영화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실감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를 주도한 감독은 이장호, 임권택, 배창호, 정진우, 유현목 등이었다. 이 시기 대표작은 이장호의 <바람불어 좋은날>과 임권택의 <만다라>를 들 수 있다. 1980년대는 우울한 사건도 있었지만 전환기로서 변화도 컸으며 영화정책의 변화와 민주화로 인한 전망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시기였다.


1980년대에 영화교육기관과 대학의 동아리에서 영화수업을 받은 인력들이 충무로로 유입된다. 그리고 해외영화제에서 임권택과 배용균이 수상성적을 내면서 대외적인 한국영화 위상이 변화된다.

 

[강제규 감독 <쉬리>]
[이명세 감독 <인정사정 볼 것 없다> ]

1990년대의 시대적 특징은 민주화, 개방화, 세계화로 들 수 있다. 한국영화계는 대기업의 충무로 진출과 금융자본의 유입으로 인해 상품으로서 영화를 본격적으로 자각하였다. 개방화와 세계화 추세에 의해 영화계도 외화수입 자유화와 한국영화 보호라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강우석, 신철, 심재명 등 합리적인 사고와 신세대의 감성을 지닌 프로듀서들이 충무로에 등장하여 기획에서 제작- 배급 -상영까지 아우르는 합리적인 충무로 시스템을 모색하고 개발하여 한국영화의 경쟁력을 갖춰나갔다. 이 시기에 등장한 감독군은 정지영, 박종원, 장선우, 박광수, 여균동, 이민용, 강제규, 김의석, 강우석, 이명세 등이며 이들은 변화된 시기를 민감하게 반영하였으며 동시에 관객과 호흡하여 흥행에서도 일정한 성적을 올렸다.

한국영화의 제작 시스템이 구축되어 가면서 블록버스터의 제작이 시도되어 한국영화 시장점유율 40%를 상회하는 성과를 보이기도 하였다. 국내의 시장점유율 증가와 함께 해외에서도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한국영화의 잠재력과 역량을 보여주는 시기이기도 하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영화는 대중오락의 종가로서 위상을 회복하였다. 한국영화사는 산재 된 자료의 정리와 해방 전 영화자료의 복원과 발굴이라는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
100여 년 이어온 한국영화사는 한마디로 눈물과 땀과 저항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글: 문학산(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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