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Scrap/Funny2006/11/27 17:00



세상은 아직 살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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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지친 서민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었는데….

동료들에게도 너무 감사해요.

동료 여러분, 비바람 불거나 눈보라 치는 날 어려운 이웃들의 우산이 되어 주세요.

여보, 혜인아, 혜원아 미안해, 사랑해. 부디 건강하세요.”

지난 21일 부산 사하구 공무원 740여 명은 커다란 우산을 하나씩 받았다.
손잡이에 ‘건강하세요’라는 문구가 적힌 우산을 갑작스레 받은 공무원들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이내 누가 보낸 것인지 알고는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을 잇지 못했다.

우산은 부산 사하구 구평동사무소에 근무하다 지난 12일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하옥례(37·여)씨가 동료들에게 보낸 마지막 선물이었다.

우산은 남편인 김명창(37)씨가 구청을 직접 찾아가 전했다.

하씨는 세상을 떠나기 전 남편에게

“가족, 동료, 친구들을 남겨두고 먼저 생을 마감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가려니 너무 아쉽다. 나라의 일꾼인 공무원으로서 힘들고 지친 서민들에게 힘이 돼 줘야 하는데… 먼저 떠나는 저 대신 세상의 우산이 되어 달라”

는 사연과 함께 선물을 부탁했다.

하씨는 15년여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누구보다도 성실했고 일 처리가 깔끔해 동료들 사이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다.

2000년에는 주민등록증 카드 전산화 작업 공로로 행정자치부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26일 집 인근 절에서 아내의 49재를 지내고 온 남편 김씨는 “아내는 그동안 도움을 주신 분들께 최소한의 답례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 아마 (하늘) 위에서 기뻐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부산=권경훈기자 [ imats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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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crap/Funny2006/09/15 15:18




Jim Brickman (feat. Michael Bolton) - Hear Me

 

 



요건 보나스로 제가 음악만 "you raise me up"으로 바꿔서 편집.

 

음악이 어떻든  정말 눈물겨운 장면입니다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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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crap/Funny2006/07/04 11:17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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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crap/Funny2006/05/11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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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crap/Funny2006/02/22 21:31


 

 

파란계정이라뜰지안뜰지 ......

네이버 동영상 하니까 2초이하의 동영상은 올릴 수 없다는 말도안되는소리를 지껄이시는.

아마 인내심이 필요하실꺼에요^^*

 

분명히 말하는데! 나나나송은 ...... 신정환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 앤디꺼에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앤디의 전 여자친구껀데 ;

하여튼 앤디가 방송에서 제일 먼저 했는데 어느새 신정환의 개그가 되어버린.

덕분에 신정환씨 인기 많이 끌었죠? ^^*

우리 앤디가 쇼프로에 조금만 더 나와서 했더라도 ....... 아까운 나나나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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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crap/Funny2006/02/08 18:41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0)인천 제물포, 천년의 역사
[서울신문 2005-05-09 08:51]
서울의 관문이라는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일본 등 열강의 침탈이 끊이지 않았던 인천. 인천의 급격한 변화는 당시 한적한 어촌이었던 제물포가 개항장이 된 사실에서도 확인되거니와 지금도 일본, 중국 등 강대국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영욕의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최근?/font>

[서울신문]중국을 겨냥하여 ‘서해안 시대’를 부르짖고 있지만 그 보다 훨씬 이전부터 인천은 서해안의 대중국 창구이자 교두보였다. 강화 고인돌과 단군의 유향(遺香)이 전해지고, 기원전 1세기로 추정되는, 미추홀과 비류백제로 상징되는 해양세력의 거점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오늘날 인천시의 남동갯벌, 도장리에서 승학천을 따라 이어지는 저지대는 바닷물이 들어오거나 습지였기에 문학산과 승학산이야말로 지리·환경적으로 초기국가 단계의 도읍지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백제시대에는 대외 창구로 기능하여 오늘날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의 능허대를 거점으로 해 중국과 넘나들었다. 한강 하류인 인천을 출발하여 덕적도를 거쳐 산둥반도 등주에 이르는 등주항로야말로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칠때 이용한 바로 그 항로이다. 오늘날 능허대는 아파트촌에 뒤덮이고 말았으나 조선 후기 읍지에 ‘백제조천시발선처(百濟朝天時發船處)라 하였듯 역사의 현장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인천이 한반도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뜬’ 것은 역시나 조선시대가 아닐까. 수도 한양에 이르는 입구, 이른바 인후지지(咽喉之地)로 온갖 역사의 영욕을 지켜보았다. 서해 뱃사람들에게 ‘행주참을 댄다.’는 말이 전해진다. 조수, 즉 밀물이 몰려들면 바닷물은 강물 위로 뜨고 바다로 내려가는 강물은 밑으로 깔리는 원리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인천쪽에서 한강을 거슬러 행주나루를 거쳐 마포까지 직행하는 뱃길 노정을 이르는 말이다. 바로 그 뱃길을 따라서 열강들이 빈번하게 침범을 강행했으니, 지금도 남아있는 수많은 포대가 이를 웅변해준다. 대개의 개항장이 시련을 겪으며 탄생했지만 인천만큼 열강들의 침략의 손길이 가장 강력하고도 직접 뻗친 곳이 또 있으랴.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등대는 바로 이런 개항의 역사를 잘 설명해주는 증거물이다.

조선에 진출하려는 열강들은 인천 해역에서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가 그것으로, 선조들은 이들의 도래를 온몸으로 싸워 막았다.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에 조선 진출의 기선을 제압하고자 운요호(雲揚號)사건(1875)을 감행했고, 끝내 조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1876)으로 문을 열게 되었음은 교과서적 상식이다. 구미 열강과도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니 은둔국 조선은 갑자기 봇물 터진 외압을 직접 받게 된다. 한적한 어촌에 불과하던 제물포는 하룻밤 새 개항장으로 둔갑하여 1883년에 인천해관과 감리서가 설치되고, 각국 영사관과 외국인 조계들이 설치되기에 이른다. 청일전쟁, 노일전쟁 등 일본의 전쟁을 위하여 조선땅을 내준 꼴이 됐으니, 이후 일본군의 군화발이 인천항을 자기 땅처럼 짓밟았다.

1892년,‘일본 밖에서 일본인 손에 의해 이루어진 가장 완벽한 일본책’으로 자평하는 ‘인천사정’이란 책자는 당시 ‘일본 영사관이 일장기를 아주 높게 휘날릴 수 있는 좋은 위치에서 장엄하고 수려하게 인천항을 삼킬 듯 바라보고 있다.’고 썼다. 정말 그들은 인천항을 강제로 개항시키고, 삼켜버렸다. 그 후 우체국, 경찰서, 일본거류지의회, 인천상법회의소, 무역상조합, 잡화상조합, 영어소학교, 공립소학교, 교토의 본원사(本願寺), 공립병원와 강제병원, 정미소, 제물구락부, 조선신보, 활자소, 그리고 제일국립은행, 제18국립은행, 제58국립은행, 일한무역상사, 우선주식회사의 일본지점 등이 속속 들어섰다. 대불호텔과 이태호텔, 수월루 등의 여관도 들어섰다.‘근래 불경기라는 소리가 인천항의 온 시가를 뒤덮는 데도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러(花紅柳綠) 흥청대기 이를 데 없으니 술집에는 어린 소녀들도 많았다.’고 한 기록도 있다. 이로써 유곽이 번창하여 도심까지 집창촌이 뻗어 나가 항구를 드나드는 뭇사내들을 유혹하였다. 교회도 빠질 수 없었으니 영국 성공회를 필두로 답동성당, 내리교회 등이 속속 들어섰다.

수출입세를 관장한 해관(海關)만큼은 조선정부 관할이었다. 물론 해관 운영에 ‘왕초보’였기에 대대로 영국, 독일, 일본인 등이 도맡아 했고 그들은 그야말로 ‘엿장사 마음대로’ 개항장을 농락하였다. 일본인들이 잘못된 협약서를 근거로 세금을 내지 않고 부를 축적했던 수탈 과정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당시 수입된 면직물은 대부분 영국제로 일본인이 수출을 독점했는데 영국도 저렴한 세금을 관철시켰다. 제국주의 경제침탈의 전형적인 모습이 인천항에서 관철되었다.

개항 당시 서울은 ‘좋지 않은 분위기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인천에 들어와 사는 사람이 적었고, 총인구 2649명 중 쓰시마, 나가사키 사람들, 그리고 시모노세키가 위치한 야마구치(山口), 규슈의 오이타(大分)사람들이 주류였다. 일제침략기를 통해 대개 한반도에서 가까운 규슈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건너왔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그쪽 방언들이 즐겨 쓰였으며, 도쿄, 오사카, 쓰시마 등 여러 곳의 언어가 섞인 것을 ‘인천어’라 부르기도 했다.

서울의 관문이었던 인천에는 개항 이래 일본인이 대거 이주해 경제수탈의 첨병 역할을 했다.사진은 지금까지 남아 당시 경제수탈의 실상을 말해주고 있는 은행 건물.

이후 인천에는 관리 세관원 은행원 회사원 무역상 중개인 운수업 하역업 여관 요리점 목욕탕 음식점 양주집 일본주점 약국 의사 사진사 이발업 재봉업 활판인쇄업 세탁소 양조장 대장간 오락실 과자점 창고업 고용직과 잡상 목수 석공 농업 등 온갖 직종 종사자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장차 식민지가 될 조선에 진출했기 때문에 러일전쟁·청일전쟁 등이 터졌을때는 자발적으로 전선구호와 간호 등에 힘을 보탰으며 스스로 무장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즉, 개항장에 나와 있던 일본거류민들을 순수한 의미로만 볼 일이 아니다. 일본의 관민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식민지 개척의 첨병으로 움직였다.‘생돈’이 생기는 만큼 화려한 의복과 음식으로 사치를 부렸다. 웅장한 반양반일(半洋半日) 가옥들이 앞다퉈 들어섰다.

개항장은 일본거류지, 각국거류지, 중국거류지로 삼분되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확연하다. 은행건물 등이 남아있는 일본인 거리, 음식점이 즐비한 중국인 거리가 그것이다. 각국 거류지라고는 해도 19세기말에는 영국인 7명, 독일인 13명, 미국인 4명, 프랑스인 3명, 이탈리아인 1명 등이 거주했을 뿐이고 대개 일본·중국인들이었다. 그런데 각국거류지 회의는 인구비례가 아니라 국적별로 참여하도록 했으며, 서양인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 게다가 회의조차 영어로 진행하니 일본인들로서는 못마땅한 일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결국 일본인들은 대대적인 간척을 통해 땅을 확보, 도심을 불려나갔다. 오늘날 인천항 주변이 대부분 간척지인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그렇다면 조선인들의 대응은 전무하였던가. 인천 출신의 역사학자 임학성(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교수는 “인천객주협회를 모체로 1897년에 설립된 인천항신상협회는 민족 상인의 상권을 옹호·신장하였다.”고 지적한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역주한 ‘인천개항25년사’(1907)를 보면, 조선인들은 오늘로 치면 송월·전·복성·인현·경·신포·답·신생·사·유·신흥·선화·도원동 등에 몰려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개항 초기에는 중국인과 일본인의 상권 경쟁이 치열했다. 중국인들은 특유의 근면과 상업적 재기를 토대로 일본에 맞섰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패하면서 결국 중국 상권도 몰락했다. 그럼에도 일정 시간이 지나자 중국인들은 다시금 성실하게 상권을 챙기기 시작했다. 오늘날 인천시가 중국인거리를 대대적으로 조성할 수 있는 터전은 이같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중국집이나 운영하고 살았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그들은 옥양목 같은 옷감장사에 남다른 재주를 발휘하여 상권을 장악해 ‘비단장사 왕서방’이란 별칭까지 얻었다.

개항 이후 인천을 토대로 뿌리를 내려 온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건립한 공자상이 인천항을 굽어보고 있다.

조선의 쌀을 싸게 사들여 일본에 되팔아 엄청난 돈을 거머쥔 자들이 생겨났으며, 경인철도가 부설되자 서울을 오가는 보따리장사는 물론이고 석유장사 등으로 일본인들 역시 큰 돈을 벌어들였다. 군인들이 자주 부르는 ‘인천의 성냥공장’이란 노래도 당시 이후 첨단 공장인 성냥공장이 인천에 많았음을 방증하며, 그만큼 선진적 공장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의 하나였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이제 인천은 일본인 대신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길목이 되었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거니와 산둥반도 등지를 오가는 페리에서 사람과 짐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중국인 거리에 가면 대하소설 삼국지를 연작 벽화로 그려놓아 길거리를 걸으면서 책읽기를 끝낼 수 있게 해놨다. 게다가 원조자장면집을 아예 자장면 박물관으로 개관할 예정이라니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박물관만큼은 ‘대박’이 예감된다. 하고많은 박물관 중에 자장면 박물관은 특이성도 돋보이지만 인천에 딱 어울리는 까닭이다.

김춘선 인천해양수산청장은 “거대한 대중국 서해시대의 거점이기도 하지만 대북 통일시대의 거점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남포, 해주 등지를 오가는 화물선들이 끊임없이 사람과 물건을 실어나르고 있다. 북핵문제 등으로 긴장이 조성되고 있지만 바닷길만큼은 항상 열려 있어 민족화합에도 이바지하는 셈이다. 인천항의 고민이 없는 것이 아니다.1970년대에 대대적으로 건설된 파나마식운하의 물을 가두었다 풀어 놓는 갑문이 낙후해 머잖아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야 할 형편이다. 갑문으로 가보니 5만t,10만t급의 거대한 선박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러나 인천항도 이제는 외항시대로 접어들었다.“인천항도 북항 등을 대대적으로 건설,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돌이켜 보면, 일제시대의 인천은 그야말로 동아시아의 중심이었다. 고베와 나가사키 쓰시마 부산 원산 톈진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잇는 정기연락선이 오고갔으니 지금보다도 훨씬 바다를 통한 국제간 교역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러시아와의 교류가 근자에 이뤄졌음을 감안할 때, 바다를 통한 교류는 무려 반세기나 묶여 있다가 재개된 셈이다. 당시 인천은 ‘완연한 한국의 요코하마’로 불렸다. 국제 첨단 신도시로 개발되는 송도신도시가 완공되면 인근 인천공항과 더불어 인천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 분명하니 돌고 도는 역사의 변화가 다시 온 몸으로 느껴진다.

[저작권자 (c) 서울신문사]

개항과 함께 인천항의 역사를 지켜온 국내 최초의 팔미도 등대(왼쪽)와 최근 축조된 기념관(오른쪽)이 100년 전부터 뱃길을 지켜온 내력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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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crap/Funny2006/02/08 18:32

 

백제의 대륙진출

 

 

 

*** 심심해서 여기저기 뒤져가며 써본 글 ***

 

 

 

이번에는 지난번에 이어서 백제가 대륙에 진출할 수 있었던 이

유와 그 학설의 타당성 등에 논점을 두고 살펴보기로 하자.

저 진출설을 뒷받침하는 몇 개의 기록을 더 살펴보면, 백제가

군현을 설치했다는 진시대에 편찬된 사서인 [진서(晉書)]에는

마한조와 진한조는 있어도 백제조는 없기 때문에 당연히 기록

이 없으며, 간접적으로 참고할만한 기록은 남아있다.

 

 

[진서]재기(載記)9 기록을 보면

 

 

 “모용황(慕容?)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인 봉유가 간언하기를,

구려와 백제 및 우문(선비) 우문부(宇文部)와 단부(段部)의 사람

들은 모두 전쟁으로 강제로 온자들이지 중국인들처럼 의리를

위해 온자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들

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10만 여호에 이르러 도성을 비좁게
할 정도이니 장차 나라에 큰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고 적고 있는데, 이는 4세기 전반 요동과 요서를 차지하고 있던

선비족 모용씨의 전연과 관계된 기사이다.

 

 

 

이글을 보면 당시 모용씨와 접하고 있던 강력한 세력들이 고구

려와 우문부, 단부 등 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거론된 백제는 현재의 학설처럼 한반도의 남부에 치우쳐 조그

마한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던 나라라면 이들이 백제를 거론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륙 진출의 시대적 배경 그리고 백제의 대륙 진출을 기록하고

있는 당나라 이후의 역사서에는 [통전(通典)]. [자치통감(自治

監)]. [문헌통고(文獻通考)]. [계동록(啓東錄)] 등에서 확실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사서에서는 거의 부정

적이고 그런설도 있다는 정도인 백제의 대륙 진출설을 중국측

의 사서에는 상당히 많이 기록으로 등장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서에 다루어지지 않은 내용이라고 무시해 버리기에는 무언

가 석연치 않음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당시의 중국은 혼돈의 시대였다. 황건적의 난을 비롯

해서 3세기 초는 삼국지(魏.蜀.吳)로 나타나는 세 나라가 황제

국으로 부상했으며, 동북 지방은 공손도(公孫度), 공손강(公孫

康), 공손연(公孫淵) 등이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해 나갔고,

280년에 중국을 통일하였던 진나라는 오래 가지 못하고 316년

에 망했으며 서진(西晉)이 건국되는데, 서진 또한 얼마 못가 멸

망하고 120여년동안 5호(五胡) 16국의 시대가 도래 한다.

 

 

 

439년에는 선비족의 북위가 북부를 장악했다가 535년의 서위

(西魏), 543년의 동위(東魏)로 분열되었으며, 북주(北周)와 북제

(北帝)로 국호를 바꾼 이들은 577년 북주가 북제를 멸하고 581

년에 북주의 외척인 양견(楊堅)이 선양(禪讓)을 받아 황제에 오

르니 이가 곧 수나라이다.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까

지는 말 그대로 혼돈의 중국 시대였던 셈이다.

 

 

 

백제의 대륙진출은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한족(漢族)은 세력의 약화로 대륙을 지배할 능력이 없었고, 북

방 또한 이렇게 혼돈의 상태였으니 해양술을 갖고 있던 백제는

대륙 진출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중국

과 한반도의 교섭 창구였던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자 이 때 많은 낙랑군과 대방군의 이민이 활로를 찾아 백

제로 내려왔으며, 이들이 백제에 와서 중국과의 외교 업무와 문

물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리라고 추론 할만하고, 백제

이들의 도움으로 활발한 해상무역을 펴나가던 중, 요서 지방

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는 주장 역시 무시할 수만은 없다. 이러

한 상황들은 우리가 역사를 보는데 근시적으로만 볼게 아니라

거시적으로 전체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대륙진출의 출발점 능허대 백제가 한강 유역과 요서와 산동반

도에 이르는 길을 연결하려고 인천에 설치했던 항구가  한나루

다. 그 한나루 터 입구에 1백 척 이상 솟아올라서, 널리 바닷가

가 펼쳐져 보이는 곳에 능허대가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능허대

주변 바다가 매립되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옛 모습을 찾아

볼 길이 없다.

 

 

그래서 1930년대에 그곳을 찾았던 고유섭 (高裕燮 :미술사학가

1905.2.2~1944.6.26)의 [청춘일기]에 쓰여진 내용을 보면, "가

을바람이 건듯 불기로 교외로 산책을 하였다. 능허대 가는 길에

도공의 제작을 구경하고 다시 모래밭 위에 가을빛을 마시니 바

다 내음이 그윽이 옷깃에 스며든다. 벙어리에서 길을 물어 가며

문학산 고개를 넘으니 원근이 눈앞에 전개되고 가을 기운이 온

들판에 넘쳤다. 미추홀의 고도를 찾아 영천에서 물마시고 큰
들을 거닐다가 신선의 열매로 여름을
작별한다.

 

 

 

이 곳 능허대라고 하는 곳은 인천의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한

10리 떨어져 있는 조그만 모래섬인데 이 조그만 반도 같은 섬에

는 나무도 바위도 멋있게 어우러져 있고 허리춤에는 흰모래가

규모는 작으나 깨끗하게 깔려 있다. 이곳에서 내다보이는 바다

는 항구에서 보이는 바다와 달라서 막힘이 없다. 발밑에서 출렁

대는 물결은 선비의 승업을 가졌다."고 시적인 분위기를 적고

있다.

 

 

 

물론 인정(認定)과 부인(否認)의 두 가지 중에서 어떤 것을 택일

하자는 것은 아니다. 편향적인 우리의 중등 교육의 현장에서 한

발 물러나 거시안적인 역사의 눈을 가져 보자는 것이다.

 

 

 

 

 

 

 

출처 : 렌즈속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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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crap/Funny2005/07/17 13:34

[펌] Manian.com

가사제공   백두산님

 

공익이 공익이 포스를 20번이나 혼자다해 ~ 공익이 공익이 포스를 20번이나 혼자다해~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 워어어에~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 ~워어어에~에에에에에~~전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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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퍄노걸
My Scrap/Funny2005/07/17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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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중에 MR(반주 경음악)불량이라는 의견이 있으니 참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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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crap/Funny2005/03/01 14:34
<청룡영화상> 이은주, 김효진의 노래실력
<청룡영화상> 이은주, 김효진의 노래실력 제 25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는 이은주, 김효진이 멋진 노래와 춤솜씨를 선보여 많은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영화 '주홍글씨'에서 클럽 가수역을 맡으며 숨겨진 노래솜씨를 선보여 팬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은 이은주는 청룡영화상 무대에서도 노래솜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이은주에 뒤질세라 영화배우 김효진도 평소 갈고닦던 재즈실력을 펼쳤다.

청룡영화상 시상식이 끝난 후 두 배우의 노래솜씨를 놓고 인터넷에서는 팬들이 "누가 더 잘불렀나"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상식이 끝난 후 주요 수상자들은 환한 표정으로 수상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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